부동산개발회사인 ‘씨드50’의 이승우 사장이 요즘 읽는 책은 다소 의외다. ‘영화마케팅’.
이유는 명료하다. “아파트와 영화는 비슷한 점이 많아요. 상품이라는 틀에서 보면 판매 기법이 아주 닮아 있지요.”
이 사장이 부동산과 영화를 한 틀에 넣는 근거는 둘 다 선불(先拂)제라는 것. 소비자가 아직 경험하지 않은 상품에 대해 미리 돈을 내야 사용가치를 얻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영화는 예고편을 통해, 아파트는 모델하우스에서 제품의 대강을 파악한 뒤 구입한다. 이 때문에 두 상품군(群)에 함께 적용할 수 있는 마케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결판〓흥행에 성공한 할리우드 대작 영화라고 해도 개봉 2주째에는 관객 수가 첫 주의 60%로 준다. 10주 넘게 상영하더라도 실제 ‘라이프사이클’은 일주일 정도다.
아파트나 오피스텔도 마찬가지. 모델하우스를 열고 난 뒤 일주일이면 분양 실적이 결정된다.
이 사장이 2001년 분양했던 경기 성남시 분당구 오피스텔도 사흘 만에 모두 팔렸다. 그 이상 넘어가면 장기전이다.
상품의 흥행 여부가 단기간에 결정되는 이유는 ‘구전(口傳) 효과’ 때문. 영화 관객이나 부동산 수요자들 할 것 없이 가장 믿을 만한 ‘정보원’은 같은 관객이나 수요자들이다. 때문에 상품이 나온 직후의 반응에 따라 소비 패턴이 따라가기 마련이다.
▽불 뿜는 사전 마케팅〓단기간에 성패가 결정되는 시장에서는 치열한 사전 마케팅이 필수다.
통상 영화 한 편을 히트시키기 위해서는 보름 전부터 광고를 할 수 있는 모든 매체에 홍보물을 싣는다.
비용도 높아지는 추세. 영화홍보사 ‘올댓시네마’의 채윤희 이사는 “몇 년 전 3억∼4억원이던 사전 마케팅 비용이 최근에는 8억∼15억원에 이른다”고 말했다.
지난해 선보인 한국영화 제작비는 편당 28억1900만원(영화진흥위원회 추산). 마케팅비용이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높아진 것을 알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이중간첩’도 제작비는 45억원이었지만 홍보비는 15억원이 들었다.
부동산업계에서도 사전 마케팅은 마케팅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금액은 현장별로 다르다. 통상 광고비는 전체 사업비의 1%. 사업비가 1조원이나 되는 현장도 있는 만큼 마케팅에 드는 비용이 영화보다 높은 경우가 많다.
▽‘인디’의 쇠락〓1990년대 중반 인디펜던트(독립·이하 인디) 영화의 대표주자였던 미라맥스가 디즈니에 배급권을 넘겼다. 이후 할리우드의 특징은 메이저 영화사들의 ‘인디 장악’으로 요약된다.
‘수익 우선’이라는 할리우드의 법칙이 ‘인디 정신’을 지배하게 됐다. 이는 다른 인디 영화사들에 체급을 늘리라는 주문으로 이어졌다.
부동산 업계의 인디는 중소형 디벨로퍼. 아이디어 하나만 갖고 쓸만한 집을 만드는 이들이다. 하지만 갈수록 입지가 좁아지고 있다는 평가다. 자금 동원력에서 대형 업체에 뒤지기 때문.
이들이 땅만 사놓고 시공과 자금 조달을 대형 업체에 위탁하는 것도 이 같은 현실을 반영한다. 아파트에 디벨로퍼의 회사명이 아닌 대형 건설회사의 브랜드를 갖다 붙이는 것도 마찬가지다.
영화업계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같은 생존법칙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디벨로퍼가 더 많다는 것.
▽‘틈새버스터’〓지난해엔 유달리 할리우드 영화의 틀을 벗어난 작은 영화들이 많았다. 1000만달러 이상 흥행수입을 올린 영화가 10편이나 됐다. ‘나의 그리스식 결혼식’ ‘스토커’ 등을 들 수 있다. LA 타임스는 이들을 ‘틈새버스터’라고 불렀다.
짭짤한 틈새버스터는 부동산 시장에서도 통한다. 작년 초까지만 해도 무명이었던 참좋은건설은 서울 종로와 서초구, 강남구 일대 자투리땅만 사들여 성공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곳을 물색해 소형 주상복합을 지어 분양률 100%를 기록했다. 올해는 5평형짜리 초소형 아파트도 선보인다는 계획.
▽그 밖의 닮은꼴〓‘대박’이 난 프로젝트는 반드시 시리즈로 나온다. 영화 ‘투캅스’나 반지의 제왕, 스타워즈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부동산 상품도 한 번 히트한 프로젝트는 속편이 뒤따른다. 경기 용인시 ‘쌍용 스윗닷홈 1∼3차’, 대우건설의 ‘디오빌’ 시리즈 등을 들 수 있다.
대박의 아류가 쏟아지는 것도 닮은꼴이다. 영화 ‘친구’가 성공을 거둔 뒤 ‘조폭마누라’ ‘두사부일체’ ‘가문의 영광’ 등 비슷한 작품이 양산됐다.
2001년 5월 서울 종로구 내수동에 분양된 오피스텔 ‘경희궁의 아침’이 예상치 못한 인기를 끌자 ‘광화문시대’ ‘용비어천가’와 같은 비슷한 이름의 오피스텔이 연달아 나온 건 부동산 시장의 아류 열풍으로 통한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