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승 선생의 후손들과 광주시청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 인부가 선생의 묘를 파내려가고 있다. -광주=주성원기자
18일 오전 광주 광산구 광산동 월봉서원 부근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1527∼1572) 선생의 분묘. 부지런히 묘를 파헤치던 인부가 “더 이상 손을 댄 흔적이 없는 것 같다”며 삽질을 멈췄다. 순간 묘 주변에서 숨죽이고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 20여명이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고봉 선생의 후손. 광주시청과 관할 경찰서 관계자들도 함께 참석했다. 최근 고봉 선생의 분묘가 도굴범에 의해 훼손당한 사실이 알려지자 문중에서는 분묘를 파 정확한 훼손 상태를 알아보려 했던 것.
조사 결과 분묘에서 부장품이 없어지거나 투장(偸葬·몰래 다른 유해를 묻는 것)의 흔적은 없었다. 백우산(白牛山) 자락에 자리잡은 고봉 선생의 묏자리는 명당으로 알려져 문중에서는 투장을 우려했었다.
전문 도굴범으로 추정되는 범인은 분묘를 파헤친 뒤 교묘히 이를 다시 덮어뒀다. 도굴범은 약 3m가량 묘를 파내려 가다 석곽(石槨·석회로 만든 외관)에 부딪혔고 이를 뚫으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한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석곽의 외부가 파손된 상태로 보아 범인들은 전동 드릴 등의 공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하지만 목관을 감싼 석곽이 워낙 견고해 공구로 50㎝ 이상 파내려 갔지만 구멍을 뚫지는 못한 것.
고봉 선생의 16대 종손 기성근씨(64)는 “당시 선생이 워낙 청렴한 생활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어 분묘를 완전히 파냈어도 부장품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광주시청 문화예술과 관계자는 “최근 이 지역에서 고봉 선생과 동시대 선비의 묘를 이장하면서 발굴했었는데 부장품은 없었다”며 “고봉 선생도 당시 풍습에 따라 부장품 없이 안장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광주=주성원기자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