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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일과 꿈]김학원/당신의 경륜, 책으로 쓰시죠

입력 | 2003-02-19 19:26:00


세상에는 책을 쓰는 사람과 책을 읽는 사람이 있다. 학교와 기업, 언론과 방송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좀 더 많은 책을 읽으라고 독려하고 있다. ‘책 읽는 사람은 아름답다’라는 문구 아래 영화배우 안성기씨의 책 읽는 모습을 담은 포스터가 학교와 서점에 뿌려지고 방송의 오락 프로그램까지 책읽기와 도서관 만들기 캠페인에 나섰다. 그러나 나는 책 읽는 사람을 위한 독서 캠페인보다 저자 캠페인을 벌이고 싶다.

책을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는 무엇이 있을까. 책 만드는 사람이 있다. 그 일에 빠져든 지 10년 동안 나는 300여종의 신간을 펴냈다.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나오는 신간이 1990년 초 2만종을 넘어 90년대 말에는 4만종을 넘어섰으니 지난 10년 동안 대략 30만종의 신간이 선보였다면, 1000종 중의 한 종이 내 손을 거친 셈이다. 내가 펴낸 책들을 발행부수로 치면 모두 380만부이지만, 그것보다는 만든 책 300종이 더 소중하게 기억된다.

▼세상과 통하는 나만의 아이디어▼

발행부수는 독자에 대한 기억이지만 발행종 수는 저자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380만부를 구입한 독자의 독서 체험을 생생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독자들로부터 때론 이 책 한 권으로 내 인생이 바뀌었다는 찬사의 엽서도 받아보았고, 그따위 책으로 선량하게 사는 사람들을 부채질하는 게 책 만드는 사람이 할 짓이냐는 질책의 전화도 받아보았다. 그렇지만 편집자로 살아가는 나의 삶에는 380만명의 독자보다 300명의 저자가 더 경이로운 기억의 체험으로 남아 있다.

물론 편집자의 손에 닿은 원고가 모두 세상에 선보이는 것은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출판사를 찾는 수백, 수천의 저자들과 저자를 찾는 수천의 편집자들이 벌이는 탐색전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어림잡아 10명 중 한 명, 10편 중의 한 편이 책으로 선보인다면, 나는 지난 10년 동안 3000명의 저자를 만나고 3000편의 원고를 접한 셈이다. 내가 만났던 수많은 저자들은 한결같이 저자 이전에는 독자였다. 독자의 삶을 살다가 어느 날 저자의 길에 도전한 것이다. 창조는 또 다른 창조를 낳는다는 말은 읽기와 쓰기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다.

어느 날 로마의 어느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던 분이 국내에 귀국해서 원고를 보내왔다. 원고는 정말 경이로웠다. 자신의 저서가 한 권도 없었던 그 철학자는 첫 책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7년 만에 고국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시작한 유일한 통로는 바로 자신의 저서였다. 그는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까지 5종의 저서를 출간했고 작년에는 저서들 덕분에 국내 대학의 교수가 되어 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자의 입장에서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 일은 마치 자기만의 신문사 하나와 방송국 하나를 얻는 일과 같다. 한 종의 책은 자기와 세상이 소통하는 독자적 미디어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수백, 수천명의 저자들을 만나고 그들과 책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1000권의 책을 읽기보다 한 권의 책을 쓰라고 독려한다. 한 권의 저서가 저자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체험해왔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대기업의 사장이라면 해당 분야에서 10년 이상 경험을 쌓은 사람들에게 최소한 한 권의 책을 쓰라고 권장할 것이다. 내가 만일 정부의 각료라면 더욱 더 ‘1인 1저서 캠페인’을 강조하고 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개발할 것이다.

▼1000권 읽기보다 1권 쓰기를▼

독서가 넓이와의 만남이고 타자와의 만남이라면, 저작은 깊이와의 만남이고 자신과의 만남이다. 인구 5000만명의 한국에서 2000만명이 독서인구인 것보다 1000만명이 저자인 꿈을 상상하는 것이 훨씬 행복하고 흐뭇하다. 작지만 깊고 창조적인 한국을 위해, 그리고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독자들이여, 오늘부터 독자에 머물지 말고 저자의 길에 나서 보라.

김학원·출판사 '휴머니스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