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중인 연극 ‘19그리고 80’ 의 주연인 모드(박정자분·왼쪽)와 해롤드(이종혁). 노인여성과 반항기 소년의 사랑이야기를 빌어 죽음 앞에 선 인간이 발견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그려낸다.사진제공 ’19그리고80’ 기획팀
현대 스웨덴 해양과학의 선구자로 꼽히는 오토 페테르손. ‘침묵의 봄’의 저자인 레이철 카슨은 자신의 저서 ‘자연,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 평생 파도와 더불어 살며 자연을 탐구한 페테르손이 노년에 아들에게 준 메시지를 세심하게 기록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조차 나를 북돋워줄 그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마지막 순간 다음에 과연 어떤 놀라운 세상이 내 앞에 펼쳐질까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호기심이란다.”
밸런타인데이였던 14일. 청바지차림부터 중년까지 유난히 객석에 커플 관객이 많았던 서울 대학로 정미소극장. 곧 80세 생일을 맞게 되는 모드(박정자)가 인생을 다 살아버린 것처럼 냉소적인 열아홉살의 해롤드(이종혁)에게 한 대사도 그랬다.
“매일매일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자. 이게 내 좌우명이지. 결국 인간은 그것을 찾아내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은 거야.” (연극 ‘19 그리고 80’ 중)
18일 오전 대구에서는 방화로 인한 지하철 화재로 120여명이 사망하고 140여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빚어졌다. 희생자들은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학교로 일터로 향하던 사람들이었다.
● 삶의 판돈
열아홉살의 중산층 가정 청년 해롤드는 홀어머니와 불화하며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한다. 취미는 장례식 참석. 어느 날 묘지에서 만난 이상한 할머니 모드는 해롤드에게 ‘매일 뭔가 새로운 것을 하자’며 나무오르기 노래하기 춤추기 담배피우기 술마시기를 가르친다. 모드와 만나며 삶에 환하게 불이 켜지는 느낌을 얻은 해롤드는 그의 팔십세 생일에 “사랑한다”며 청혼한다. 그러나 모드는 이미 음독한 상태. 스스로 소멸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터였다.
한국에서 87년 초연된 후 두 번째 공연되는 ‘19 그리고 80’은 할리우드의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였던 콜린 히긴스가 ‘해롤드와 모드’라는 제목으로 쓴 작품이다. 이번 공연은 당초 3월 16일에 끝날 예정이었지만 관객반응이 뜨거워 4월까지 연장될 전망이다. 그 흡인력은 ‘죽음 앞에서 당신은 무엇을 소중히 여기겠는가’라는 질문. 서바이벌게임, 번지점프 같은 극한을 부러 체험하며 삶에서 내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는 현대인들에게 의사(擬死)죽음체험은 그 어떤 것보다 강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프로이트의 냉소적인 분석에 따르면 “산다는 게임에서 가장 큰 판돈인 삶 자체가 걸려있지 못할 때엔 삶의 흥미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판돈’이 얼마 남지 않아 곧 게임을 끝내야 할 모드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판돈이 남아있는지 가늠조차 못하는 해롤드를 향해 치어리더처럼 춤추며 외친다.
“세상에는 죽는 걸 즐기는 사람들이 아주 많이 있지.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죽는 것은 아니야. 다만 인생 가운데 마음의 눈이 닫힌 것이지. 손을 뻗쳐! 위기를 기회로 잡아라! 물론 상처를 입을 수도 있지. 그러나 끝까지 시합을 하는 거야. 나가자! 우리팀 나가자! 나에게 ‘생’을! 나에게 ‘명’을! 엘 아이 에프 이!”
● 미리 쓰는 유서
삶을 성찰하기 위한 방법으로 죽음 가까이에 서 보는 체험은 대중매체에까지 퍼졌다. MBC의 라디오프로그램인 ‘여성시대’는 3일부터 ‘남기고 싶은 나의 유서’라는 청취자 투고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까지 투고된 것은 400여편 이상. ‘사랑하는 나의 아내와 아들에게’ ‘사랑하는 당신’ ‘부모님께’…. 가까운 가족이 수신인인 유서를 읽어 내려가다가 투고자들은 때로 격한 감정에 말을 잇지 못한다. 이 코너를 기획한 최석기 PD는 “나는 잘 못 살았다는 회한이 사연의 주를 이룬다”고 밝혔다.
98년 6월 한국어 초판이 발행된 후 올 1월까지 3판122쇄를 거듭한 책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의 영향력도 한국사회의 ‘죽음에 대한 성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기호다. 책은 미국 브랜다이스대 사회학과 교수였던 모리 슈워츠가 루게릭병으로 몸이 화석처럼 굳어가던 생애 마지막에 제자 미치 앨봄과 매주 화요일마다 나눈 대화를 앨봄이 정리한 것이다. 강의의 주제는 ‘인생의 의미’.
죽음의 신에게 쫓기며 진행하는 대화가 자칫 절박하거나 처절했을 법도 하지만 ‘사라져가기’를 받아들이는 스승 모리의 자세는 그가 좋아했던 춤추기의 스텝만큼이나 경쾌하고 진솔하다. “천천히 쇠락하는데 가장 두려운 게 뭡니까”라는 질문에 모리는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 내 엉덩이를 닦아줘야만 된다는 사실”이라고 답한다.
모리 교수는 ‘19 그리고 80’의 모드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매일 배우고 변화했다. 스승을 떠나 세상으로 나간 뒤 실패의 쓴 맛도 보고 스포츠칼럼니스트로 성공해 인생역전도 했지만 일중독자로서 중년의 공허에 맞닥뜨린 제자 미치에게 모리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의 인생을 의미있게 살려면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위해 바쳐야 하네. 자기가 속한 공동체에 헌신하고, 자신에게 생의 의미와 목적을 주는 일을 창조하는 데 헌신해야 하네.”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우리가 가졌던 사랑의 감정을 기억할 수 있는 한, 우리는 진짜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잊혀지지 않고 죽을 수 있네.… 죽음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지, 관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네.”
● 존엄이 강탈된 죽음
그러나 모드나 모리처럼 인간으로서 품위를 갖추어 작별인사를 할 기회를 갖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대인들은 위엄있는 죽음을 맞기 어려운 환경에 산다.
중세부터 현대까지 서구인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연구한 프랑스 역사학자 필리프 아리에스는 근대 이전의 과거에는 사고나 전투의 경우에서조차도 급작스러운 죽음은 드물었다고 말한다. ‘인간은 수천년 동안 자신의 죽음과 그 죽음의 국면을 지배하는 주권자로 존재했다. 인간은 오늘날 그런 존재의 모습을 중단했다.’(‘죽음의 역사’ 중)
아리에스는 집에서 병원으로 처소를 옮겨간 죽음, 환자에게 끝까지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으며 환자가 임박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부도덕하게 여기는 근대의학의 태도를 ‘죽어가는 자로부터 죽음을 빼앗은’ 주범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1984년에 세상을 떠난 아리에스는 20세기말 도쿄의 지하철과 르완다의 마을, 보스니아의 거리,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2001년 뉴욕, 2003년 한국의 대구에서 어떻게 인간 죽음의 존엄이 훼손되고 강탈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볼 수 없었다.
21세기의 죽음은 일상의 허를 찌르며 준비할 수 없이 다가온다. 가족이 함께 식사를 하는 집 지붕 위로, 출퇴근길 지하철이나 버스 안에, 도심의 빌딩과 밤의 디스코텍에 잠복해 있다. ‘할머님은 죽을 때를 향해 자연스럽게 삶의 어느 끝에서부터 차근차근 죽음으로 자기를 이끌어 가셨습니다. 뒷산 귀목나무처럼’(김용택의 시 ‘섬진강 24-맑은 날’)과 같은 죽음은 이제 복된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 됐다. 왜 목표물이 되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해 서로 다른 정치사회집단이 자기의사를 표현하는 도구가 되거나 사회적 화풀이의 대상으로서 희생양이 되는 죽음. 인간의 마지막 통과의례인 죽음의 고매함은 진창 속에 던져졌다.
끊임없이 삶과 죽음이 함부로 다뤄지는 경험을 하고 난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인간일 수 있을까.
한때 이름을 잃어버리고 ‘아우슈비츠 수용소 수감번호 119104번’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유대계 정신의학자 빅토르 프랑클 박사는 그에 관한 고백을 남겼다. 친위대 장교의 고갯짓 하나로 삶과 죽음의 운명이 갈렸던 아우슈비츠에서의 체험을 훗날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분석한 프랑클 박사는 자신이 물체, 정신이 담기지 않은 넝마덩어리가 되어갔다고 고백했다.
‘조금 전에 끌려나간 시체의 멍한 눈이 내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만해도 나는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계속해서 수프를 열심히 먹었다.’(프랑클 저 ‘삶의 의미를 찾아서’)
그러나 수감자들이 ‘인간’으로 회귀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때는 있었다. 프랑클 박사는 수용소 운동장, 비로 파인 웅덩이에 비친 노을을 모두들 벅찬 감동으로 말없이 지켜보다가 누군가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탄식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극한의 상황에서 그가 기대었던 것은 마음 속의 아내 얼굴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없었다. 그는 가족 중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러나 그는 분노 대신 삶의 의미를 묻는 방식을 코페르니쿠스적으로 바꾸는 심리치료요법을 주창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있느냐를 깨닫는 것이다. …삶의 참다운 의미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 속에서가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
● 에필로그
71년 ‘해롤드와 모드’가 영화화됐을 때 히긴스는 “컬트와 블랙코미디의 기묘한 결합” “블록버스터 실패작을 만들었다”는 혹평을 들었다. 그러나 히긴스가 88년 47세의 나이에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작품세계를 평가할 때 첫머리를 차지하는 작품은 ‘나인투파이브’나 ‘파울플레이’같은 할리우드 흥행작이 아니라 ‘해롤드와 모드’다.
히긴스는 에이즈로 투병중이던 86년 자신의 이름을 딴 공익재단을 만들었다. 이 재단은 에이즈에 맞서 싸우며 예방활동을 벌이는 조직과 게이 레즈비언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의 지위향상을 위해 애쓰는 단체들을 후원한다. 그리고 히긴스의 모교인 스탠퍼드대 영문과와 UCLA연극영화학부 대학원생 중 “인간의 정신을 풍성하게 한 작품을 만든” 이에게 장학금을 수여한다.
모드가 살아갈 날이 많은 해롤드에게 남긴 마지막 부탁을 히긴스는 그렇게 지켰다.
“이젠 사랑을 모르는 다른 이를 더욱 사랑해줘요.”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