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년 말까지 내각제 개헌을 완료한다는 DJP의 97년 대선 공약은 애당초 지켜지기 어려운 ‘대선용 합의’였음이 공동정권 집권 이후 점차 명백하게 드러났다. 99년 12월 22일 DJP회동에서 ‘합당불가’에 합의한 직후 열린 국민회의와 자민련 의원 부부동반 만찬에서 DJ(오른쪽)와 JP가 서로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
99년 7월 18일 서울 워커힐호텔의 한 빌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자민련 김종필(金鍾泌) 총리와의 부부동반 오찬이 끝난 뒤 “잠깐 얘기 좀 하자”며 JP를 방 한쪽의 다른 자리로 끌었다.
▽DJ=정계가 개편돼야 한다는 국민의 여론이 높습니다. 양당(국민회의와 자민련)이 함께 신진인사를 영입해 국민적인 새로운 정당을 만드는 게 어떻겠습니까. 김 총리께서 당을 맡아 주시고….
▽JP=합당 같은 큰 문제는 당 차원의 결의가 있어야 하는 것인 만큼 양당 3역회의를 통해 당(黨) 대 당 차원에서 얘기를 해나가는 게 좋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연내 내각제 개헌은 저희들(자민련)도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봅니다만, 국민에게 약속한 것이니까 국회에서 발의만이라도 좀 시켜주셨으면 합니다. 한나라당이 반대한다면 통과는 안 되겠지만 국민 앞에 정성을 다하는 모습은 보여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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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그건 곤란합니다. 통과되지 않을 줄 뻔히 알면서 생색만 내려고 술수를 썼다고들 비난하지 않겠습니까.
▽JP=….
이날 비밀 회동은 휴식을 위해 전날인 17일부터 2박3일 예정으로 워커힐호텔에 머물고 있던 DJ가 JP 부부를 식사에 초청하는 형식으로 마련됐다. 그러나 애당초부터 DJ는 합당을, JP는 내각제 개헌 발의를 서로에게 설득하려는 엇갈린 속셈을 갖고 있던 까닭에 어느 쪽으로든 합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하지만 회동 사실이 20일 일부 언론에 보도되면서 사안은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했다.
우선 총리실과 자민련이 발칵 뒤집혔다. 합당논의설에 자극받은 자민련 의원들은 “내각제 포기에 합의하고서도 우리를 속인 것 아니냐”며 항의하고 나섰다.
결국 JP는 이날 저녁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박태준(朴泰俊·TJ) 총재를 비롯한 주요당직자들을 불러 심야 마라톤회의를 열고 해명을 시도했으나 당직자들의 불만은 쉽게 진화되지 않았다. 강창희(姜昌熙) 원내총무가 이 자리에서 “내각제 관철을 위해 국민회의와 청와대에 강력한 태도를 보여야 한다”며 JP의 총리직 사퇴 결단을 촉구하자 JP는 “책임지라면 지겠다”고 화를 내며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 JP는 다음날 아침 기자회견을 준비토록 실무진에게 지시했다.
상황이 심각하게 돌아가자 TJ는 자정 무렵 김중권(金重權) 대통령비서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내일 아침 JP를 모시고 청와대로 들어가겠다”며 DJ에게 보고하고 회동을 준비해 줄 것을 주문했다.
김중권의 회고. “JP가 총리공관에서 기자회견을 갖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긴장했다. 회견을 한다는 것은 곧 JP의 내각 철수와 DJP 연합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TJ와 의논 끝에 DJP간의 허심탄회한 대화가 아니고는 사태를 풀 수 없다고 판단했다. 오전 2시쯤 주무시던 대통령을 깨워 ‘JP와 조찬회동을 하시는 게 좋겠다’고 보고해 승낙을 얻어냈다.”
이렇게 마련된 다음날 DJP의 청와대 조찬 회동에서는 내각제 연내 개헌 포기와 합당 합의 부인 등 4개항의 합의내용이 발표됐다. 이로써 DJP 연합은 가까스로 고비를 넘겼으나 내각제개헌은 사실상 물 건너갔다.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가 초래된 것이다.
하지만 관련자들의 증언을 종합해보면 당시 DJP간에는 이미 내각제 개헌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공감대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이렇게 보면 워커힐 회동으로 빚어진 해프닝은 DJ와 JP로서는 서로 ‘울고 싶은 데 뺨 때려준 격’이 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 DJ의 한 핵심참모는 “당시는 JP도 국민이 내각제를 받아들일 자세가 안돼 있고, 양당 의석을 합쳐봐야 개헌 선인 3분의 2에 턱없이 모자라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음을 여러 채널로 듣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
DJP의 워커힐 회동 1주일여 전인 7월12일. 김종필 명예총재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이동복(李東馥) 전 의원은 총리실에 들렀다가 JP로부터 “지금 이 상태에서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는 뜻밖의 말을 들었다. 이동복이 “나라가 망하지 않도록 내각제를 하자는 것인데 왜 망하느냐. 합의를 지키지 않으면 민주당이 책임져야지 왜 총리가 책임지느냐”고 따졌으나 JP는 “우리가 책임지게 돼 있다. 이 실장이 당에 가서 (당론 변경을) 설득해달라”고 말했다.
이동복은 총리실을 나와 김용환(金龍煥) 수석부총재를 만났다. 심상찮은 상황을 전해들은 김용환은 이날 저녁 강창희와 함께 삼청동 총리공관을 기습 방문했다.
▽김용환=자민련의 존립 이유와 공동정권의 성사 조건이 내각제라고 늘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JP=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내각제를) 떠든다는 것은 국력낭비와 함께 대통령에게 상처만 입힐 뿐이야. 우리가 먼저 깨끗이 정리를 하는 게 좋겠어.
▽김용환=그렇다면 당으로 돌아갑시다. 당을 재건하는 전면에 서 주십시오.
▽JP=(화를 내며) 죽어도 이 자리를 못 내놓는다. (총리직을 사퇴하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국가를 생각해야지. 나를 압박하러 온 모양인데 당신들은 정치를 잘 몰라. 국민은 약자를 끝도 없이 밟는다. 날더러 혼자 죽으란 얘기냐. 당신들은 왜 나한테만 미루나.
강창희도 “총리께서는 왜 충청도 의원들을 그렇게 미워하십니까”라며 가세, 고성이 오고가자 김용환은 강창희를 이끌고 공관을 나섰다. 실제 JP의 이 같은 태도에는 내각제에 대한 한나라당의 부정적인 태도도 크게 한몫을 했다.
99년 3월. JP는 비밀리에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 총재와 만나 내각제 성사여부를 직접 타진했다.
한 측근의 증언. “JP는 회동에서 이회창에게 ‘김 대통령이 제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도 모두 대통령제 때문 아니냐. 이 총재가 집권해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이 나라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이 총재도 내각제 개헌에 동참해달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이회창은 ‘내가 DJP 합의사항인 내각제에 찬성하면 DJP 공조를 인정하는 결과가 된다. 두 분의 연대를 야합이라고 비난해온 내가 내각제를 인정한다면 논리적 모순에 빠지게 된다’며 거절했다.”
결국 이회창이 내각제 수용을 거부하는 한 한나라당의 내각제론자들도 내각제에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운 만큼 현실적으로 내각제 개헌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JP가 확신하게 됐고, 이 같은 고민의 일단이 이동복에게 여과 없이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내각제 유보에 동의해준 JP는 그해 이듬해 1월 DJ와 결별한 뒤 독자적으로 치른 4·13 총선에서 교섭단체 기준(20석)에 못 미치는 17석밖에 건지지 못했다. 결별은 했지만 내각제 문제를 둘러싸고 DJ와 제대로 각을 세우지 못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 것이다.
JP의 추락은 DJ에게도 고통이었다. 가뜩이나 소수 정권인 처지에 자민련과도 결별함으로써 법안이건 예산이건 한 건도 뜻대로 통과시키기 어렵게 됐기 때문이다.
DJ와 민주당은 마침내 2000년 말 ‘의원꿔주기’란 헌정사상 유례 없는 해프닝을 벌이며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도와주고 DJP 공조를 겨우 복원시켰다.
당시 민주당의 절박한 사정은 DJ의 장남인 김홍일(金弘一) 의원까지 자민련에 꿔주려했던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민주당의 한 중진은 “배기선(裵基善) 송영진(宋榮珍) 송석찬(宋錫贊) 의원을 ‘임대’해줌으로써 자민련을 20석으로 만들어줬지만 강창희 의원이 반발, 탈당함으로써 자민련은 교섭단체 기준에서 다시 1석이 모자라게 됐다. 이때 DJ는 김홍일에게 자민련행을 지시했다. JP에게 최대한 성의를 보이려 한 것이다. 그러나 김홍일이 강력 반발함으로써 이 구상은 성사되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결국 DJP 정권의 출발점인 내각제 개헌은 실종된 채 정략적 이해만 남아 두 사람의 결별과 봉합의 동인(動因)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한동총리 DJP파경후 잔류한 까닭▼
2001년 9월3일 자민련이 임동원(林東源) 통일부장관의 해임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져 가결시킴으로써 DJP 공조가 파경을 맞은 직후 자민련 출신인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가 ‘내각잔류’ 결정을 내린 것은 미스터리 중의 하나다.
당시 당 소속 각료들의 ‘내각 전원 철수’를 결정한 당론에도 불구하고 이한동이 이런 결정을 내린 데 대해 정치권에서는 “DJ로부터 ‘차기’에 대한 언질이 있었을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JP의 한 측근은 “당시 DJ를 대신해 이한동을 만난 한광옥(韓光玉) 대통령비서실장이 ‘우리 당에 누가 있느냐’며 대선후보 영입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당시 청와대와 동교동계 일각에서는 실제 이한동을 민주당과 자민련의 통합신당 총재로 내세우고 지역통합과 보수안정을 기치로 그를 대선후보로 민다는 시나리오가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한 실장측은 그 무렵 두 차례 이한동을 만난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대권) 얘기가 설사 있었다 해도 DJP 사이에 오갈 얘기지 대리인을 통해서 할 얘기냐”고 일축했다.
이 전 총리도 “대권이니 정치적 장래니 하는 얘기는 당시는 물론이고 총리 재임기간에 한번도 김 대통령과 나눠본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그는 다만 DJ는 “나라의 여러 어려움을 감안, 국정 안정을 위해 임기 끝까지 함께하자는 마음이었다”고 말해 DJ의 ‘간곡한 설득’이 있었음은 굳이 숨기지 않았다.
이한동의 한 측근은 “오히려 대권을 생각하면 자민련으로 복귀해야 한다는 참모들의 의견이 많았다. 그러나 당내에서 이미 ‘역적’ 운운하는 상황이고 지인들의 만류 전화도 줄을 잇자 결심을 바꾼 것 같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청와대측은 이한동이 자민련 복귀로 기우는 듯하자 ‘총리 교체설’을 흘리며 간접적으로 압박을 가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한동은 총리 잔류선언 이후 “불효자식이 효자 노릇 하는 수가 있다. JP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처럼 (국가 원로로) 모시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대권 도전에 실패함으로써 JP를 나카소네처럼 모실 기회를 갖지 못했다.
▼특별취재팀 명단▼
▽팀장=이동관 정치부 차장
▽정치부=윤승모 차장급기자 박성원 최영해 김영식 부형권 이승헌 기자
▽경제부=반병희 차장 김동원 김두영 신석호 기자
▽사회부=하종대 이명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