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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속소설가 이문구…역사에 오래 남을 작가"

입력 | 2003-02-26 18:46:00

26일 오전 이문구씨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친구 박상륭씨가 빈소를 지키고있다. -김동주기자


이문구의 외우(畏友)이자 ‘난해소설’ 작가로 후배 문인들의 ‘숭배’를 받고 있는 소설가 박상륭은 캐나다에 머물고 있던 지난 금요일 저녁(현지 시간)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로부터 난데없는 비보를 전해 들었다. 서라벌예술대 61학번 동기, ‘40년 지기’ 이문구가 아주 위중하다는 소식이었다.

부랴부랴 비행기표를 끊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허공에서 17시간을 보낸 뒤 24일 오후 5시(한국 시간) 인천공항에 도착, 바로 친구가 입원해 있는 서울 중구 인제대 백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이미 친구는 의식이 없었고 다음날 밤 영결(永訣)하고 말았다.

“이 선생은 내가 올 거라는 것을 알았나봐요. 보고 싶은 사람을 손꼽아 이야기하면서 ‘박상륭 지금 날아오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조금 더 일찍 알았더라면 가기 전에 몇 마디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셨나요.”

“캐나다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뭘 했는지 들려주고 싶었어요. …이보게, 내가 이번에 장편 하나 써 왔네….”

그는 2000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인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를 보고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유언 같은 제목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쉬고 싶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나 봅니다.”

30여년에 걸친 박상륭의 외국 생활로 시시콜콜한 일상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다르면서도 같은 이 두 사람은 편지로, 또 이문구가 다달이 캐나다로 부쳐오는 문예지로 마음을 전하곤 했다.

“우리는 성격이 아주 달라요. 외모도 그렇고. 이 선생은 덩치 좋고 잘 생기고 곧잘 뒷전에 앉았어요. 나는 작고 못 생기고 앞에 앉고. 나는 늘 싸움을 걸고, 이 선생은 말리고. 젊은 시절에는 만나면 한국 문학판을 안주 삼아서 막걸리를 함께 들이붓기 일쑤였지요.”

동료 작가이자 독자로서 박상륭은 이문구의 작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선생의 주제는 대지와 흙입니다. 인류가 가진 큰 원형적인 주제를 추구한 작가입니다. ‘땅’이라는 유토피아를 구현하고자 했던 작가지요. 농촌 또는 농민 소설가, 토속적 유머라고 규정을 지으면 이 작가가 가진 장점이 제한됩니다.”

고인은 문단의 대소사와 온갖 궂은 일에 헌신했다. 그러면서도 생색을 내거나 살뜰히 내 몫을 챙기지도 않았다. 이런 그를 박상륭은 ‘군자며 대인’이라고 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영달보다는 집단의 선에 기여하고 싶어했습니다. 도량이 큰 사람이에요. 유교적 사고에 바탕을 둔 청빈주의 선비주의와 의리, 이런 것들이 이 친구를 평생 동안 꿋꿋하게 살아오게 했을 거예요. ‘외유내강(外柔內剛)’, 말 그대롭니다.”

영겁(永劫)으로 사라진 친구의 빈소 앞에서 박상륭은 어느 한 곳 자리잡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시시때때로 간절하게 담배 생각이 난다고 했다.

“떠나 보내는 마음은 슬프지만, 남아 있는 사람들 얘기지요. 그 친구는 일상적 삶 속에서 빠져나가 역사 속에서 자유로운 상태를 누리게 됐습니다. 자리를 옮긴 것뿐이에요. 역사 속에 오래 남을 작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문구처럼 말예요.”

▼이문구 선생님 영전에 ▼

85년 문에지 신인문학상을 통해 등단한 신경숙씨(오른쪽)는 당시 심사를 맡았던 이문규씨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지만 사제지간처럼 지내왔다. -사진제공 신경숙씨

선생님.

한밤중에 지인으로부터 선생님께서 운명하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한동안 책상에 앉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와서 길게 놀다간 직후, 그들의 흔적을 둘러보고 있던 차였습니다. 기어이 가시는구나, 마음이 먹먹해서 그만 책상에서 일어나 방안을 왔다갔다했습니다. 그저께 캐나다에서 막 도착한 박상륭 선생과 함께 뵈었을 때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이런 이별을 예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박 선생님조차도 겨우 알아보시던 선생님. 그 며칠 전에 뵈었을 땐 흔연하게 웃으시며 반겨주시고, 김동리문학상 걱정도 하시고, 저에게 언제나처럼 예쁘다고 농담도 하셨는데 그저께는 단 한 말씀도 못하셨어요. 그때 이미 세상을 향해 열려 있던 선생님의 육체가 서서히 문을 닫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끝간 데 없는 슬픔처럼 더는 마르실 데가 없을 것 같았는데도 사흘 만에 다시 뵌 선생님은 더 깊이 패어 계셨어요. 그래서 그야말로 본질만 남아 계시던 선생님. 병상에 계시면서도, 더는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눈짓으로 오가는 사람 마실 것을 챙기시던 선생님. 문득 선생님 손을 보았지요. 까칠하게 야윈 채로 형형하게 빛이 나던 선생님의 큰 손. 이 손으로 그 많은 일들을 해내셨구나, 한동안 선생님 손을 가만히 잡고 있었습니다. 속절없이 조금만 더 살아 계세요, 선생님, 한 십년만요, 간절하게 바랐습니다.

선생님이 이렇게 일찍 가실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아프시다는데도 어쩐지 선생님은 병마를 꿋꿋이 이겨내시고 큰바위 얼굴처럼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들을 지켜보시겠지, 여겼습니다.

아시는지요. 제가 스물세 살에 선생님의 심사를 받고 문단에 나온 뒤 마흔이 된 지금까지 지난 17년 동안 내내 저는 선생님의 심사를 받았다는 것이 늘 자랑스러웠습니다. 자주 뵙지 못해도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늘 변함 없이 그 자리에 계실 것 같았습니다. ‘만연체 문장의 독보적 개척자’이신 선생님께서 탄생시킨 강인하고 싱싱하고 왁살스러운 소설 속 인물들에게 저는 늘 혼이 나는 기분이었는데도 그러하였습니다.

어찌 저만 그렇겠는지요. 선생님을 흠모하는 후배들이 선생님을 바라보는 마음은 밤 기차를 타고 가다가 어둠 속 산자락 밑에서 반짝이는 먼 불빛을 보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죄다 잘못을 탓해도 어째서인지 선생님께서는 흠을 덮어주시리라는 믿음은 곧 선생님 인격에서 흘러나온 것이겠지요.

며칠 전에 선생님이 그러셨지요.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담담히 말씀하시다가 시대가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에 앞장서서 데모하는 일이 사실은 굉장히 무서웠다고 하셨지요. 입술에 거즈를 댄 채였지만 그 말씀을 하실 적만 해도 저는 선생님을 이렇게 쉽게 떠나보내게 될 줄은 정녕 몰랐습니다. 늘 산맥처럼 믿음직스럽고 앞뒤 살펴보지 않고 그저 따르고 싶은 분이셨기에 사실은 무서웠노라고 말씀하시는 게 낯설기조차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음날이면 선생님은 맨 먼저 나가 맨 앞줄에 앉아 계시곤 하셨다지요. 무서우셨다면서 왜 그러셨어요? 묻자 선생님께서 희미하게 웃으시며 약속을 했으니까, 하셨습니다. 어떡해야,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그러셨지요. 제게는 그 말씀이 선생님의 유언처럼 들립니다.

선생님 떠나신 빈자리가 너무 큽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후배 소설가 신경숙 바침

▼펜클럽 등 4개단체 공동 문인장 치르기로▼

25일 밤 타계한 고 이문구(李文求)씨의 빈소가 있는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영안실 5호.

부인 임경애씨(50)와 아들 산복씨(26), 딸 자숙씨(25)를 비롯해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이시영 이사장 직무대행과 강형철 상임이사, 시인 이흔복씨 등 문인들이 26일 새벽부터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이날 소설가 박완서 조정래 김주영, 시인 고은 황동규 안도현씨 등도 서둘러 빈소를 찾았다.

문인들은 고인의 장례를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작가회의,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등 4개 문인단체가 연합해 28일 오전 9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문인장으로 치르기로 했다. 문인단체들이 한 작가의 장례에 뜻을 함께 하는 것은 처음이다.

문인들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포용하려한 고인의 뜻이 사후에 문단의 화합으로 이어졌다”고 입을 모았다. 20여년간 입장이 서로 다른 문인단체들이 한자리에 회동하는 것도 쉽지 않았던 까닭이다.

빈소에 전해진 고인의 유언은 문인들을 숙연케 했다. 고인은 “나와 관련된 것은 하나도 남기지 말라”며 “내 이름을 딴 문학상과 문학비도 만들지 말고 유고도 태워라”고 유언했다. 유해도 고인의 뜻에 따라 화장돼 충남 보령시의 ‘관촌(冠村)’으로 영원히 돌아간다.

빈소에서는 북한 문제에 대한 견해 차이로 소원했던 소설가 황석영씨가 23일 병문안을 와 “형, 미안해”라며 안타까워했다는 이야기가 화제가 됐다.

이날 소설가 한승원 김훈 이순원 이경자 김영현 심상대 성석제 조경란 김연수씨, 문학평론가 김윤식 백낙청 김치수 김화영씨, 민음사 박맹호 회장, 창작과비평사 고세현 대표이사, 문학과지성사 채호기 사장 등이 빈소를 찾았다.

노무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조화를 보냈으며 김성재 문화부장관, 현기영 문예진흥원장,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 영화감독 이창동, 영화배우 문성근씨도 빈소를 찾아와 조의를 표했다. 발인은 28일 오전 8시. 02-760-2022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