듀엣 ‘브라운 아이즈’ (왼쪽)와 그룹 ‘쿨’. 이들은 20, 30대의 지지로 음반판매량에서 수위를 지키고 있는 가수들로 손꼽힌다
2000년 이후로 음악계에서 매년 반복되는 말이 있다. ‘음반산업 사상 최악의 불황’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과장이나 엄살이 아니다. 매년 음반산업은 ‘최저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지난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가요의 경우 2002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음반인 그룹 ‘쿨’의 7집 판매량이 65만장에 불과하다. 김건모와 조성모의 음반이 200만장을 돌파하고, 서태지의 신보가 150만장을 넘지 못했다고 해서 ‘판매 부진’ 운운했던 것이 불과 3, 4년 전의 일이다. 한 대형 음반매장 관계자는 “댄스 가수들은 신보가 나와도 1주일이 지나면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며 “god나 서태지 등 빅 스타들의 새 앨범이 나오면 예전에는 아침부터 줄을 서서 사는 분위기였지만 이제는 그런 광경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전했다.
팝 음악의 상황은 더욱 심각해서 2002년 한 해 동안 20만장 이상 판매된 음반이 한 장도 없다. 가장 많이 팔린 팝 음반은 유명 가수들의 신곡을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인 ‘MAX9’. 그러나 판매량은 겨우 17만여 장에 불과하다.
음반시장의 심각성은 삼성경제연구소가 2월10일 내놓은 보고서 ‘국내 음반산업의 주요 이슈와 대응방안’에서도 확인된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음반시장의 성장률은 2001년에 전년 대비 -10%에서 지난해 다시 -25%로 떨어졌다. 2년 연속 큰 폭으로 감소한 것. 대중음악 평론가인 박준흠씨는 “1996년에 한국 음반시장의 규모는 4000억원 선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3000억원도 안 된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전했다.
▼10대의 경우 실제 구매효과 적어▼
한때 세계 10위권 안에 들었던 한국 음반시장이 왜 이렇게 참담한 상황을 맞게 된 것일까. 전문가들은 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시작된 경기침체, 컴필레이션 음반의 무분별한 제작, 그리고 ‘소리바다’ 등 인터넷 음악 공유사이트들의 난립을 큰 이유로 든다. 실제로 IMF 당시 크게 고전했던 음반시장은 2000년 들어 경기가 회복되면서 어느 정도 정상궤도에 올라섰다. 그러나 이때부터 쏟아진 컴필레이션 음반들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음반시장을 잡아먹는 ‘괴물’이나 다름없었다. “새 음반이 나온 지 석 달만 지나면 신곡들을 담은 컴필레이션 음반이 나옵니다. 그런데 소비자들이 왜 굳이 한 가수의 신보를 사겠어요?” 한 음반매장 관계자의 반문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음반산업에 치명타를 날린 것은 ‘소리바다’ 등 음악 공유사이트들이다. 현재 무료 음악 다운로드 및 스트리밍(실시간 감상) 사이트들의 국내 이용자 수는 무려 2000만명에 달한다. 이들 2000만명에게 음악은 ‘돈 주고 사는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공짜로 받는 것’인 셈이다.
음악공유 사이트의 급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음반사들은 법에 호소하는 최후의 수단을 택했다. 2월 초 5개 메이저 직배 음반사를 비롯한 국내 30개 음반사들이 인터넷 음악 제공사이트 2개사를 저작권법 위반 혐의로 형사고소했다. 또 17일에는 11개 음반사들이 음반파일 공유프로그램인 ‘소리바다’를 상대로 낸 서버운영 중지 가처분신청을 법원이 최종 인가했다. 그러나 이 정도 처분으로 음반산업을 덮은 먹구름이 걷힐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내의 음악 공유사이트가 중지되면 해외 음악 공유사이트에 접속하는 등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음악을 다운 받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노래 외에도 게임, 휴대전화 등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많아진 요즈음의 추세를 생각해볼 때 음반시장의 불황은 어느 정도 예견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네티즌들이 음악을 다운로드 받는 것이 음반산업에 얼마나 큰 해악인지를 깨닫지 못하는 한 음반시장은 살아나기 어렵습니다. 심지어는 한 가수의 음반이 출시되기도 전에 음반 수록곡들이 음악 공유사이트에서 돌아다닐 정도거든요.” 워너뮤직 서동진 상무의 설명이다.
한 대형 음반매장 전경
그러나 이처럼 절망적으로 보이는 상황 속에서도 한 줄기 희망이 있다. 바로 30대 이상의 장년층 구매자들이다. 이들은 음악 공유사이트에서 음악을 다운 받는 과정에 익숙지 못하거나, 설령 다운 받을 줄 안다 해도 컴퓨터 앞에 앉아 음악을 듣느니 차라리 음반을 사는 방법을 택한다. 실제로 대형 음반매장인 교보문고 ‘핫트랙스’의 멤버십회원 중 20, 30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80%를 넘는다. 반면 10대는 10%에도 못 미친다. “10대들은 매장에 자주 오기는 하지만, 정작 음반을 사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꾸준히 음반을 사는 계층은 대개 30대 이상이지요.” ‘핫트랙스’ 음반영업팀 진홍현 대리의 설명이다.
▼중장년층 겨냥 ‘올드팝 음반’ 붐▼
음악애호가 이재훈씨(33)는 인터넷에 능숙하지만 항상 음반매장에 가서 음반을 산다. “제대로 갖춰진 상태에서 음악을 듣는 게 좋기 때문이죠. 파일 상태로 음악을 듣거나 저장해놓으면 오래 보관하기가 힘듭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다운 받은 음악은 음질도 좋지 않은 것 같아서 듣고 싶은 음악은 꼭 음반으로 삽니다.”
음반 판매량에서도 이 같은 세대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1집 ‘벌써 1년’에 이어 2집 ‘리즌 포 브리딩(Reason for Breathing)’ 역시 판매고 70만장을 돌파한 듀엣 ‘브라운 아이즈’는 단 한 번의 방송출연도 하지 않은 ‘신비의 그룹’이다. 공개 무대에 선 경험 역시 지난해 월드컵 개막식 축하공연이 유일하다. 그러나 세련되고도 애절한 리듬 앤 블루스(R&B) 음악을 구사하는 이들의 음악은 30대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3집 판매량이 58만장을 넘어선 왁스, 최근 스페셜 음반을 내놓은 이수영 등도 30대에게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가수들.
“10대와 20대는 음악을 듣고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지만, 30대 이상 세대에게 음악은 ‘한 번 듣고 버리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이들은 음악을 사서 소장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최근 국내 팝음악 시장에는 ‘올드 팝 음반’의 출시 붐이 불기도 했어요.” EMI 김동기 대리의 설명이다.
김대리의 말대로 전반적인 팝시장의 부진 속에서도 비틀즈, 아바, 퀸, 롤링스톤즈, 스콜피온즈, 비지스 등 70, 80년대에 인기를 얻었던 팝가수들의 음반은 꾸준한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2000년 하반기에 발매된 ‘비틀즈 No.1’의 누적 판매량은 60만장을 넘어섰다. 이런 추세를 반영하듯, 2월4일에 올드 팝 그룹 ‘시카고’가 내한공연을 한 데 이어 3월7일에는 ‘60년대 소녀들의 우상’ 클리프 리처드가 34년 만에 한국공연을 한다.
몰락을 걱정해야 할 만큼 심각한 불황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음반산업. 그 속에서 30대는 작은 희망이다. 음반산업 관계자들은 구매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제대로 대접할 줄도 아는’ 이들 30대가 음반산업을 구해줄 불씨를 지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