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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트로 스케치]'봄이 오는 길목' 양재동 화훼공판장

입력 | 2003-02-28 18:04:00

서울에서 봄이 가장 먼저 찾아오는 곳인 서초구 양재동 화훼공판장. 젊은 여성들이 꽃을 둘러보며 봄 기운을 느끼고 있다. -권주훈기자


며칠 전 남녘에서 매화가 첫 꽃망울을 터뜨렸다. 머지않아 섬진강에 매화가 흐드러지고, 봄을 알리는 화신(花信)이 북상(北上)할 것이다.

옛 사람들은 잔설(殘雪)을 헤치며 막 피기 시작한 매화를 찾아다니곤 했다. 이를 심매(尋梅) 혹은 탐매(探梅)라 불렀다. 3월, 서울 사람들은 어디에서 화신을 만날 수 있을까.

지난달 27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수산물유통공사 화훼공판장을 찾았다. 화환 꽃바구니 매장에서 박모씨(44·여)가 프리지어를 보듬고 있었다.

“친구 딸의 대학 입학 선물로 한 다발 사려고요. 노란색이 참 예쁘죠. 향기도 좋고. 거실에 놓을 것도 좀 골라야 하는데….”

옆에 있던 주인이 “봄에 잘 어울리는 꽃은 장미 프리지어 아이리스 튤립 수선화 히아신스 등이에요”라고 조언했다.

국내 최대의 꽃시장인 양재동 화훼공판장이 요즘 분주하다. 졸업과 입학철인 데다 서둘러 봄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

이곳은 생화 도매장, 화환 꽃바구니 매장, 분화(盆花) 난 매장, 초화(草花) 매장 등으로 나뉘어 500여개 업소가 성업 중이다. 하루 평균 2억원 안팎(약 2000상자)의 경매도 이뤄진다.

분화 난 매장 앞에선 유치원생 3명이 통나무를 어깨에 메고 칙칙폭폭하며 기차놀이를 하고 있었다. 봄이 되면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이 소풍을 많이 온다고 한다.

분화 난 매장에 들어서자 나비 모양의 흰색 분홍색 호접란(胡蝶蘭)이 화사하게 반긴다.

이곳을 처음 찾았다는 김성연씨(27·여)는 “나비들이 날아다니는 것 같다”며 흥분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주인은 “호접란은 화사한 색깔과 모양 덕분에 받는 사람의 기분을 가장 좋게 하는 꽃”이라고 웃으며 화답했다.

그 옆으로 철쭉 영산홍 베고니아 등도 즐비하다.

서서히 꽃 향기에 취해가는 순간, 어딘가에서 큰 소리가 들려왔다.

“5000원만 빼 줘.”

“빼긴 뭘 빼. 안 된다고 몇 번을 말해요.”

“내가 여기 한두 번 오나.”

“에이, 오늘 운세가 왜 이런지.”

5만원짜리 난을 놓고 벌어진 흥정이었다. 흥정엔 화사한 꽃집도 예외일 수 없는 법.

매장 한 쪽에선 50대 남성이 배달용 꽃 장식천에 열심히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이날 있었던 장관 임명 소식이 생각나 “혹 신임 장관 축하 꽃 배달 의뢰는 없었는지”하고 물었다.

“글쎄요. 요즘 공무원들 꽃 받지 않으려고 해요. 금지된 모양이던데요. 화훼 농가도 먹고살아야 하는데. 봉투보다 꽃이 낫지 않나요. 근데 농림부 장관은 받는다고 하더군요. 화훼 농가한테 혼날지 모르니까.”

구경하던 한 모녀가 깔깔 웃었다. 갓 스물 되었을까, 딸의 손에 들려 있는 시집 한 권.

‘짤깍, 잠겨 있던 책상 서랍이 열리고…/겨우내 자고 있던 기억의 밀실에/불이 켜진다’(강인한의 ‘봄의 열쇠’ 중).

하나둘 터뜨리는 꽃망울이 겨우내 잠자던 기억을 건드린다. 알전구에 불이 들어오듯 양재동 화훼공판장의 봄은 그렇게 오고 있었다.

이광표 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