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별 고통 없이 임종을 맞았죠? 전날 같이 목욕 갔다 왔잖아요. 목욕하고 임종 맞으면 좋은 곳에 간대요.’
‘너, 보고 있니? 이제 편하니? 그 불길 속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가슴이 아파서 도저히…또 눈물이 나….’
▼대구참사와 뉴욕 9·11테러▼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무너뜨린 9·11테러를 뉴욕에서 지켜본 까닭일까. 대구지하철 참사현장의 추모 분위기가 뉴욕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고 현장에 꽃과 촛불을 놓는다거나 희생자의 사진과 애틋한 사연을 남기는 것도 ‘슬픔의 세계화’처럼 흡사했다.
너무나 갑작스럽고 예견할 수도 없었던 죽음을 목격하고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은 듯, 뉴욕인들은 가족과 같이 있는 시간을 늘렸다. 서둘러 귀가한 대구 사람들은 식구들과 저녁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를 절감하고 있다.
가족주의와 함께 미국인들의 삶과 의식을 크게 바꿔 놓은 것은 애국심이었다. 미국에 악의를 지닌 외부 테러리스트의 공격에 맞서 그들은 성조기를 휘날리며 하나로 뭉쳤다. 인기가 바닥을 헤매던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은 강인한 리더십을 지닌 지도자로 거듭났고, 말실수 잦고 멍청하다는 비아냥을 듣던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지율도 솟구쳤다.
이에 비해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는 세상에 불만을 품은 내부인의 소행이기 때문일까. 대구는 애국심 아닌 나라에 대한 배신감으로 가득 차 있다. 지하철공사측이 사고 즉시 제대로 대처하기만 했어도, 안전 수칙과 구난 체계만 갖춰져 있었어도 이런 참극은 없었을 것이라는 울분으로 뒤숭숭하다. 잘하면 줄리아니 시장처럼 위대한 리더로 우뚝 설 수 있었던 대구시장은 이리저리 책임만 회피하다 유족들로부터 물러나라고 비난받는 지자체장으로 전락했다.
이제 대구지하철 방화 참사가 우리 사회의 총체적 부실의 상징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개혁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강조했듯 원칙을 바로 세우기만 해도 이 같은 후진국적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단 원칙을 세우고 지키는 쪽은 대통령과 정부가 먼저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무능하고 부패한 철밥통 관료주의, 끼리끼리 해먹는 정경유착의 관행, 반칙이 철칙이 되어버린 시스템 운용 등을 완전히 뒤바꾸지 않는 한 대구의 참사는 언제든지 또 일어날 수 있다.
‘검증되지 않은’ 새 각료들에 대한 불안이 적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번 물어보자. 경험 많고 학식 높은 지금까지의 관료들은 과연 무엇을 해 왔는지. 돈과 지위와 특권에만 관심을 쏟았던 ‘스놉 엘리트’들은 대대손손 물려줄 기득권을 지키는 데 골몰하느라 ‘더불어 사는 균형 발전사회’엔 눈을 감았다. 파이를 키운 뒤에 나눠주겠다던 그들의 약속은 아무리 파이가 커져도, 아직은 아니라는 이유로 지켜지지 않았다. 빈부 차만 더욱 벌려 놓았을 뿐.
서열과 타성을 뛰어넘고 발탁된 신임 장관들은 대통령 취임사대로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성공하는 사회’로 우리나라를 개혁할 것으로 믿고 싶다. 사회부조리와 불의를 경험한 비주류이므로 초심대로 '정직하고 성실한 국민이 보람을 느끼는' 사회를 만들 것이라고 기대한다.
▼광기의 개혁이 되지 않으려면▼
9·11테러 이후 미국인의 애국심을 바탕으로 테러를 뿌리뽑겠다고 나섰던 부시 대통령은 그러나 이젠 테러에 대한 그 분노를 조직화해 또 다른 전쟁으로 치닫고 있다. 미국 편에 서면 선(善)이요, 안 서면 악(惡)이라는 광기의 흑백논리는 세계의 시곗바늘을 냉전시대로 돌려놓았다.
노 대통령과 ‘파격 장관’들의 행보도 미국을 닮을까봐 겁난다. 언론의 정당한 비판도 ‘딴지걸기’로 간주된다면 앞으로 정부 편에 서면 개혁이자 선이요, 이견을 내면 반개혁에 악으로 몰릴 우려가 크다.
새 정부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국민은 없다. 신임 내각은 대구 참사의 슬픔을 새 나라를 만드는 힘으로 승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다. 그 개혁이 광기로 흐르지 않도록 다스리는 것은 전적으로 노 대통령의 책임이다.
김순덕 yur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