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 84주년이었던 1일 서울은 마치 광복 직후의 좌우 이념대립이 재현된 것처럼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한국자유총연맹 재향군인회 등 보수진영의 100여 단체는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반핵 반김정일 자유통일 3·1절 국민대회’를 열고 주한미군 철수 반대와 한미공조체제 강화를 소리 높여 외쳤다.
반면 여중생범대위 등 진보 성향의 단체들은 이날 오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모여 반전과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 전면 개정 등을 요구하며 성조기를 찢는 시위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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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盧정부의 美외교라인
같은 날 벌어진 두 집회는 미국에 대한 국민의 인식과 여론이 좀처럼 합치점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갈라져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과연 한국에서 미국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서울 강동구 명일동에 사는 주부 김모씨(42). 그는 평소 시위와는 거리가 멀지만 지난해 말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여중생 추모 촛불시위에 우연히 동참한 적이 있다.
시내에 볼일을 보러 나갔다가 우연히 시위 광경을 보자 불쌍하게 숨진 여중생들이 애처롭기도 하고, 불평등한 SOFA 개정 요구에 공감이 가 촛불을 들고 시위 물결에 잠시 합류했던 것.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반미주의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저의 가장 큰 관심사는 중학교 3학년인 딸과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이 영어를 잘하게 되고, 가능하다면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갈 수 있게 되는 것이에요.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요.”
그는 미국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강경한 대북정책을 우려하지만 그렇다고 맥도널드 햄버거나 스타벅스 커피점 등을 이용하는 데 별다른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다고 밝혔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선 친미와 반미 사이의 스펙트럼이 넓고,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지난해 6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을 계기로 광범위하게 표출되기 시작한 대미 평등 주장은 6·25전쟁 이후 50년간 지속되어온 한미동맹이 이제 새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준다.
외교안보연구원 윤덕민(尹德敏) 교수는 최근 ‘한미동맹의 도전’이라는 주제의 논문에서 “한미동맹은 냉전 해체와 남북정상회담에 따른 북방위협의 변화, 미군 장갑차 여중생 치사사건을 계기로 조성된 주한미군에 대한 부정적 여론 표출 등에 따른 반미주의의 확대로 인해 중대한 전환의 기로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경제발전 등으로 한국의 국가적 자부심과 자신감이 높아진 반면 반세기 동안 변화되지 않은 한미동맹의 틀은 ‘몸에 맞지 않는 옷’으로 남아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한미관계의 변혁을 과연 어떻게 이끌고 수용할 것인지 여부이다. 미국이 전 세계의 전력 재편 차원에서 검토하고 있는 주한미군의 기지 이전과 감축, 부분적 철수 등은 당장 한국 사회에 상당한 충격과 부담을 줄 소지가 크다.
미 공화당의 론 폴 하원의원(텍사스)이 지난달 13일 “북한에 맞서 미국 정부는 주한미군 주둔 비용으로 120억달러나 쓰고 있음에도 한국에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며 하원에 주한미군 철수 및 대한 방위보장 중단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이례적으로 제출한 것은 미 정계 저변에 흐르는 기류 변화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원 국제관계위원회는 현재 이 결의안을 회람 중이다.
북핵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한국이 주한미군의 억지력을 대신하기 위해서는 국내총생산의 2.7% 수준인 국방예산을 5% 이상으로 증액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한국의 안보에 대한 우려가 높아질 경우 해외 투자가들이 대한(對韓) 투자를 기피, 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이 초래될 것도 분명하다.
외교는 현실이다. 미국의 입장에선 한국이 없어도 국가생존에 별 문제가 없지만 한국의 입장에선 좋든 싫든 미국은 국가의 흥망과 직결돼 있다. 그런 미국을 우리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한미관계의 변화는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김영식기자 spe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