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여름, 내가 공부하던 시카고에서 서부의 유타주(州)로 가는 길은 참으로 멀고도 더웠다. 방학을 맞아 잠시 다 접고 동생 집에나 다녀오자고 나선 걸음이 고역일 줄이야. 에어컨도 고장난 차로 꼬박 3박4일을 달려간 우리 가족은 도착과 동시에 파김치가 됐다. 이튿날, 뻐근한 몸을 벌떡 일으켜 세우는 상큼한 단어 하나가 내 귀를 스쳤으니…. 바로 ‘카지노’였다.
내가 누군가. 이미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구슬치기로 가끔 용돈도 벌어 썼지. 그리고 고스톱이든 포커든 도박이라고 하면 절로 침이 꼴깍하던 사람 아닌가. 뒤늦게 공부를 한답시고 한동안 까맣게 잊고 살았었는데, 뭐, 카지노라고? 난 지체 없이 동생을 불러 세워 자초지종을 고하게 했다.
참고로 그곳 학교에서 금속공학 공부를 거의 마쳐가던 동생은 일찍부터 그런 쪽에 밝았다. 어릴 땐 구멍가게 ‘또 뽑기’, 커서는 전자오락, 당구, 바둑, 각종 게임 및 도박, 골프…. 종목이 뭐든 일단 손만 대면 금방 수준급에 오르는 이른바 잡기의 귀재였다. 아마 그 기본원리를 비교적 빨리 터득하는 편이었으리라.
어쨌든 그런 그의 재능을 안 썩히고 가끔 선행을 베풀며 산다는 것이었다. 어쩌다 동네 이웃이 카지노에서 돈을 잃고 오면 가서 본전 찾아 주는 일이 선행이라 했다. 그리고 형님, 형수님도 먼 길을 왔는데 구경이나 한 번 하고 가라는 게 동생 말이었다. 이게 웬 행복한 날벼락이냐며 난 일어섰다. 그 순간 더 이상의 여독은 없었다. 마음은 이미 카지노에, 눈앞엔 한 뭉치 일확천금이….
카지노는 네바다주 경계를 넘으면 바로 나오는 웬도버라는 소도시에 있다고 했다. 거리는 120마일(약 190㎞)이란다. 말로만 듣던 카지노를 오늘에야…. 시간이 돈인데 뭘 꾸물대고 있나….
1분이라도 시간이 아까워 괜히 죄 없는 집사람을 들볶고 있는데, 동생이 날 좀 보자고 했다. 그리곤 지갑 있으면 좀 보여 달라더니 동생은 단박에 내 신용카드를 압수(?)했다. 인간이라면 돈 잃고 이거 안 긁곤 못 배긴단다.
한도까지 긁고 나면 전화로 한도 증액 신청해서 또 긁는단다. 못 믿을 게 사람 마음, 그러니 집에 두고 간다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한방 먹고 입맛을 쩝쩝 다시는데, 어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현금은 얼마까지 잃을 용의가 있는가 묻더니 그 액수만 남기고 나머지를 또 빼앗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 두 집은 길을 나섰다. 그리고 그렇게 나선 그 길이 장차 내 투자인생의 첫걸음이 될 줄이야 세상에 누가 알았으랴.
시카고투자컨설팅대표 cic2010@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