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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의 새로쓰는 한국문화]'2차 서울탈환작전

입력 | 2003-03-05 19:27:00

구한말 의병의 모습. 1907년 간행된 매켄지의 ‘한국의 비극’에 수록된 사진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의 봄은 3·1절과 함께 온다.

해마다 3월에 한국인들은 나라의 자주독립을 다시 생각한다. 박은식 선생은

한국역사에서 자주독립 수호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의병의 전통’을 들었다.

그런데 구한말 일제 침략 때의 항일의병운동에서 그 절정이었던 1908년 5월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이 종래 역사에서 빠져 있다. 여기서는 이를 밝히려고 한다.》

일본군이 한반도에 불법 상륙하여 강점을 시도하자 1894년부터 시작된 의병운동이 1907년 8월부터 고양기에 들어갔다. 일제가 한국 강점 준비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해산하자 해산군인들이 불복하여 봉기했다. 이를 계기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국민들이 의병으로 봉기하여 국권회복의 항일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강원도의병장 이인영(李麟榮)은 전국의병부대들에 연합부대를 편성해서 서울을 탈환하자는 통문을 돌렸다. 이에 호응하여 경기도의병장 허위(許蔿), 강원도의병장 민긍호(閔肯鎬), 충청도의병장 이강년(李康年) 등을 비롯한 전국의 다수 의병장들이 경기도 양주에 모여서 전국 ‘13도 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라는 의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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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도 창의대진소는 서울탈환작전을 시작해서 선봉대는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감행하였다. 그러나 본대가 약속 지점에 도착했을 즈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 작고 소식을 받았다. 이인영은 부친 상례를 치르기 위해 서울탈환작전의 중지를 명령한 후 뒷일을 군사장 허위에게 일임하고 귀가하였다. 총대장이 ‘효’를 위해 ‘충’을 희생시킴으로써 이 작전은 중단되었다는 것까지가 종래의 설명이었다.

그러나 이때의 자료를 검토해보면 새 사실들을 발견하게 된다. 13도 연합의병부대가 1908년 1월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했을 때에는 36회의 전투로 탄약이 거의 소진되어 전투능력이 상실되었다. 이때 이인영 본진에 도착한 소식은 부친의 별세가 아니라 중병 소식이었다. 이인영은 이를 별세의 ‘흉보’가 왔다고 알리고 전투중지를 명령한 다음 전권을 군사장 허위에게 인계하고 귀가하였다. 이인영은 무기와 탄약의 고갈 때문에 자기가 누명쓰는 희생을 하여 의병의 희생을 줄이려고 전투를 중지시킨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제2대 의병총대장 허위는 철수하자 즉각 제2차 서울탈환작전을 준비하여 무기·탄약·군량 준비를 갖춘 후 1908년 4월 21일 13도 의병연합부대의 재의거 격문을 전국에 띄웠다. 이에 호응하여 13도 의병연합부대가 재거해서 서울을 포위하고 서울탈환 공격전을 시작하였다. 의병대는 고양군 창신리와 불광리, 뚝섬, 동작나루까지 진출해서 치열한 유격전과 공격전을 감행하였다. 동시에 총대장 허위는 일제통감에게 국권 반환 요구의 32개조를 통고하였다.

일본군은 1개 사단 병력으로 방어하다가 다급해지자 본국에 긴급지원을 요청했다. 1908년 5월 8일자로 일본군 제6사단 제23연대와 제7사단 제27연대의 2개 연대가 긴급 증파되어 의병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공격에 대한 방어에 투입되었다.

약 30일간 1000여 회의 밀고 밀리는 혈전 끝에 의병부대는 다시 탄약이 고갈되어 1908년 6월 서울 외곽으로부터 철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단 2장의 의병 사진은 영국 ‘데일리 메일’ 기자 매켄지 서울탈환작전 때의 의병을 찍어 보도한 것이다.

일제의 저평가된 통계에 의해도 1907년 8월부터 1910년까지 연인원 14만6000명의 의병이 2820회의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중 1908년 전투가 1452회, 전투참가 의병이 6만9832명이었다. 이 전투 대부분이 의병연합부대의 제2차 서울탈환작전 전투였다. 일본군사령부는 1908년 2, 3월에 의병의 종식을 보리라 예견했는데 도리어 5월에 의병의 ‘미증유의 치성(熾盛)’이 있었다고 기록 보고하였다.

의병 희생자는 일본군의 저평가된 통계에 의해도 1907년 8월부터 1909년 말까지 전투 중 전사한 의병이 1만6700여 명, 중상자가 3만6770여 명이었다. 빼앗긴 조국을 찾으려고 이 짧은 기간에 무려 5만3000여 명의 의병들이 이 땅 위에 선혈을 뿌린 것이다. 그들은 생명을 조국에 바치면서 어떠한 생각을 했을까? 산문으로는 벅차서 ‘의병의 노래’라는 시(詩)로 전사 의병들의 뜻을 기록해 보았다.

1.

도포를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를 달구어 창을 빚어라.

원수의 왜노가 또 침노하였다.

금수강산 높고낮은 봉우리마다

햇불을 올려라, 북을 울려라.

앉아서 망하면 부모형제가 노예되고

일어서 싸우면 조국강산을 지키리라.

조상이 대대로 묻힌 아름다운 우리 강산

후손들의 영원한 자유의 나라.

침략자 왜노의 머리 위에

쇳물을 쏟아부어라.

홍주성에서, 북한강에서

후치령 고개에서, 일월산에서

금수강산 방방곡곡 골짜기, 봉우리에서

13도 깃발을 하나로 모두어

서울을 탈환하여라.

2.

우리가 싸우고 싸우다 전사해서

뼈가 들판에 드러나고

살과 가죽이 창 끝에 발리어져도

동포여, 형제여!

후회하지 말아라.

우리 사랑하는 어머니땅에 묻히니

우리들의 피가 이 흙에 스며 옥토되고

우리들의 영혼이

꽃이 되어, 역사되어

우리 아들딸들에게 전해져서

죽은 영혼을 깨어나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아나게 하리라.

한백년 지나 깨어난 후손들이 나팔 울리면

무덤을 열고 나와 함께 우리 진군하리니.

자유 광명의 인류 미래를 향해

오래 오래! 코레아! 오래 오래!

(오래=‘만세’의 고대어)

우리가 ‘의병의 역사’를 새 세대에게 제대로 교육한다면 어떠한 위기도 극복하고 나라의 자독립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신용하 서울대 사회학과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