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의 즐거움/데이비드 블래트너 지음/한영덕 옮김/130쪽/1만2000원/경문사
파이(π)의 정확한 값을 적어놓은 책이 있다면 우주에서 가장 큰 책이 될 것이다. 소수점 이하 무한개의 자릿수를 점하는 ‘무리수’인 까닭이다.
“How I like a drink, alcoholic of course, after the heavy lectures involving quantum mechanics”(양자역학에 관한 어려운 강의가 끝난 지금 어찌나 한 잔 하고 싶은지)라는 말로 영미권 대학생들은 π값을 암기해 왔다. 각 단어의 글자 수를 숫자로 환산하면 열다섯 자리까지의 π 값이 나온다.
'임의의 원과 정확히 같은 크기의 사각형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물음은 여러 문명권에서 원주율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노력을 불러왔다.레오나르도 다비치가 그린 인체 비례도.사진제공 경문사
사실 열 자리만으로도 지구 크기의 원둘레를 1인치 이하의 오차로 계산할 수 있다. 가장 친근한 값인 ‘3.14’만 알아도 일상생활에선 충분하다. 우주의 주재자(主宰者)는 그 값을 정확히 알고 있겠지만 인간은 최근에야 ‘겨우’ 500억자리 남짓한 근사값을 계산해냈고 4만여자리까지 암송하는 사람이 나왔을 뿐이다.
‘사각 울타리와 원형 울타리에 필요한 가시덩굴의 길이가 다르네?’ 라고 생각했을 때부터 인류는 이 값에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대다수는 큰 관심을 갖지 않은 채 땅에 묻혔다. 그러나 탐구심 때문에, 호사 취미로, 경쟁심에서 ‘궁극의 π’를 향해 자신의 생을 무한수렴하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있었기에 π는 역사가 됐다.
원주율이 문헌에 등장한 것은 모든 문화권에서 기록물의 등장과 거의 때를 같이 한다. ‘직경이 십 규빗이요 그 모양이 둥글며 주위는 삼십 규빗 줄을 두를 만하며…’라고 한 구약성서의 기록은 고대 문명권에서 π가 3을 약간 넘는 숫자로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기원 후 수세기까지 숫자는 조금씩 정밀해졌지만 그 계산법은 복잡하기 그지없었다. 원둘레에 안팎으로 맞닿는 다각형을 이용해 계산했던 것. 각 문명권이 가진 π의 ‘정밀도’는 그 문명권의 지적 수준까지 입증해준다. 450년경 중국의 조충지는 변이 2만4576개인 다각형을 써서 π의 값을 113분의355(약 3.1415929)로 계산했다. 일곱 자리까지 맞는 이 숫자의 정밀도는 이후 1000년 동안 깨지지 않았지만, 유럽에 그 정밀성의 기록을 빼앗긴 뒤 중국은 세계 지식의 챔피언 자리를 잃었다.
16세기 말에는 π의 역사에서 신기원이 이룩됐다. ‘무한급수’를 이용한 계산이 등장한 것. 예를 들어 1-(1÷3)+(1÷5)-(1÷7)…을 거듭하면 4분의 π라는 값을 얻게 된다. 이후 더욱 빨리 계산할 수 있는 공식을 찾아내는 데 경쟁의 초점이 맞춰졌다. 계산이 빨라지면서 1837년 152자리, 1853년 607자리까지의 π값이 밝혀졌다.
1949년 진공관 컴퓨터가 2037자리의 값을 계산해낸 뒤 π는 기계와 인간의 능력을 극한까지 시험하는 초경쟁의 무대가 되었다. 일본인 가나다와 러시아 출신 미국인 그레고리 처드노브스키의 대결은 이런 경쟁에 극적 요소를 부여했다. 88년 가나다가 2억자리, 이듬해 처드노브스키가 10억자리, 95년 ‘가’가 60억자리, 이듬해 다시 ‘처’가 80억자리…라는 식이었다. 근무력증 환자로 침대에 누워있는 처드노브스키의 면모는 휠체어를 탄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의 모습과 맞물려 신비감을 자아내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책의 줄기를 이루는 ‘역사’다. 그러나 곳곳에 사금처럼 박혀있는 잡다한 ‘사실’을 외면한다면 이 책의 참 재미는 느끼지 못한 것과 같다.
‘임의의 두 정수 사이에 서로 공약수(公約數)가 없을 확률은 6을 π의 제곱으로 나눈 값과 같다’는 사실은 기하(幾何)와 대수학(代數學)을 넘나드는 신비감을 준다. 기사 서두에 소개한 ‘π 암기용 구문’도 ‘중세 버전’ 및 각국어 버전 등으로 열 편 넘게 소개된다. ‘코끼리의 키(발에서 어깨까지)는 발의 지름×2π’라는 공식은 그럴싸한 우연 정도로 웃고 넘어가자. ‘PIE’와 ‘3.14’는 거울로 뒤집어보면 서로 닮아있다는 ‘우연’도 마찬가지 (π는 영어에서 ‘PI’로 쓴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실. 이 책에는 π가 100만자리 값까지 인쇄돼 있다. 농담?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저자는 수학자가 아니라 IT관련 베스트셀러를 30여권이나 펴낸 컴퓨터 엔지니어. 원제 ‘The Joy of Pi’(1997).
유윤종기자 gustav@donga.com
▼파이란?▼
수학자 : 파이는 원의 둘레와 지름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이다.
물리학자 : 파이는 3.1415927에 ±0.000000005이다.
공학자 : 파이는 약 3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