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열정을 시로 승화시켰던 시인 조병화씨의 빈소. 노무현 대통령과 이창동 문화관광부 장관 등이 조화를 보냈으며 많은 후배 문인과 지인들이 빈소를 찾아 조의를 표했다. -박주일기자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중에서).
8일 오후 타계한 조병화(趙炳華·82)씨는 인생이라는 크고 어려운 주제를 평이한 비유와 소박한 어법으로 노래해 세상 사람들에게 따뜻한 감동과 위안을 주었던 시인이다.
“시는 나의 호흡, 내면의 소리가 날숨처럼 시로 나온다”고 말했던 고인은 시집, 수필집, 화집 등 모두 160여권의 책을 남겼고 그중 창작시집만도 52권에 이른다. 이 같은 다산성(多産性)은 그의 시가 일상 속에서 숨쉬고 말하듯, 편지 쓰듯 쉽고 편하게 쓰여진다는 데서 연유한다. 그의 시집 중에서도 ‘사랑이 가기 전에’(1955) ‘남남’(1975) 등은 독자들로부터 큰사랑을 받았다.
1945년 9월부터 경성사범학교 물리 교수로 사회 생활을 시작한 그는 제물포고를 거쳐 서울고 교사로 재직하던 1949년 첫 시집 ‘버리고 싶은 유산’을 발표한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교사 조병화가 문단에 들어설 수 있도록 힘을 북돋아준 사람은 경성사범의 동료 교사였던 시인 김기림. ‘물리를 가르치는 조병화 선생이 시를 쓴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 시를 보여달라고 했고 첫 시집을 내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조병화는 김광균 박인환 김수영 등 ‘모더니스트’ 시인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곤 했다.
“문학이란 삶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에서 출발한다”고 이야기했던 고인은 인간의 실존적 삶을 다룬 순수시만을 일관되게 써왔다. 이런 그에게 김수영은 “넌 부르주아, 난 프롤레타리아”라고 빈정대기도 했지만, 조병화 자신은 김소월 한용운 윤동주 같은 ‘휴머니즘의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원했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씨는 “일상의 범상한 사람살이와 범상한 정감이 말하듯 편지하듯 토로되어 있는 그의 시는 누구에게나 쉽게 호소력을 갖는다”고 평했다. 문학평론가 김재홍씨는 “그의 시는 사랑, 이별과 애수, 긍정과 달관, 어머니와 고향, 고독과 허무의 시 등으로 요약되며 인간주의, 낭만주의, 순응주의, 영원주의에 정신적 기반을 두고 있다”고 평했다.
한국시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등을 지낸 고인은 합리적인 발상과 무리 없는 처신으로 일단 자리를 맡으면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광복 이듬해부터 1970년까지 대학럭비축구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는데, 학창 시절 럭비선수로 뛰었던 경험과 서울고 재직시 럭비팀을 창설하고 감독 코치를 맡아 전국체전에서 우승까지 거머쥐었던 경력 때문이었다.
고인은 “세상을 떠난 뒤에는 문인장이다 뭐다 하지 않고 50권째 시집 제목처럼 ‘고요한 귀향’을 하겠다”고 얘기하곤 했으며, 자신의 묘비에 쓸 시 ‘꿈의 귀향’도 이미 지어뒀다.
‘나는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이 세상 나왔다가/ 이제 어머님 심부름 다 마치고/ 어머니께 돌아왔습니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