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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리뷰]'갱스 오브 뉴욕' 폭력과 이중성

입력 | 2003-03-12 18:38:00


▽심=‘갱스 오브 뉴욕’의 첫 살육 장면은 정말 쇼킹하지 않아요? 그렇게 영화를 시작하는 방식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도 시도했던 건데, 마틴 스코시즈 감독이 그 점에서는 스필버그에게 진 것 같아. ‘갱스 오브 뉴욕’의 살인장면은 부담스러울 만큼 강도가 세잖아. 죽는 자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넘어지는 장면이 굉장히 많은데, 관객 입장에선 그 개싸움 판에 직접 들어가서 보는 듯한 느낌이 들어.

▽남=일종의 과잉이다?

▽심=그렇지. 피의 살육을 직면하라는 주문. 관객 입장에선 너무 부담스러워.

▽남=아냐. 폭력장면들이 충격적이긴 하지만 스코시즈 감독은 폭력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고. 생사를 건 살육전이 다시 시작되려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함포사격으로 싸움이 지지부진해지잖아. 최후의 대결인데도 두 주인공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브러지고. 관객들이 그 장면을 코믹하게 받아들이더라고. 왜 그렇게 설정했겠어. 스코시즈 감독은 아버지의 복수에 집착하는 주인공이 정말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고 있다’고 말하려 했던 것 아닐까. “지구는 돌고 있는데 우리만 느끼지 못한다”는 대사도 나오잖아.

▽심=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폭력을 과잉 연출한 이유는 ‘거리두기’가 아니라 ‘각인’이야. 어렸을 때 목격한 아버지의 죽음에 평생 집착하는 주인공의 동기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해 아버지의 죽음이 얼마나 아이의 뇌리에 깊게 각인이 되는지를 강조하려 했던 거지. 내가 아쉬운 것은, 스코시즈 감독의 영화는 늘 폭력적이었지만 대개는 폭력 그 자체를 보여주는 수준을 뛰어넘었다는 거야. 그런 점에서 위대했지. 그가 그려왔던 폭력은 의사소통이 안되는 상태에서의 편집증적 폭력, 정신적 폭력 같은 것들이었다고. 그런데 ‘갱스 오브 뉴욕’에는 물리적 폭력 이상이 없어.

▽남=그건 상업적 고려 때문이야. 요즘 ‘반지의 제왕’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보여지는 폭력장면의 수위에 맞추려다 보니 폭력의 과잉연출을 하게 된 것 아니었을까.

▽심=‘이야기’도 너무 관습적이어서 실망스러워. 캐릭터 구축에도 실패한 영화야.

▽남=에이∼. 빌 더 부처(대니얼 데이 루이스)같은 캐릭터를 봐. 얼마나 입체적이야. 사람의 손등에 칼을 찍는 악당이면서 동시에 암스테르담(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젊음과 재능에 반해 아버지의 역할을 하잖아. 악한이지만 인간적 면모를 느끼게 해주는 성공적인 인물의 창조지.

▽심=빌 더 부처가 입체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 사람 자체가 뉴욕이기 때문이야. “네가 암스테르담이냐? 그럼 나는 뉴욕이다”같은 대사도 나오잖아. 빌 더 부처의 의안(義眼)에 박힌 문양도 독수리 문양이고. 그 인물 안에 스코시즈 감독은 뉴욕을 담고 싶었겠지. 그런데 시대나 나라에 대한 은유를 한 인물로 표현하는 방식은 새로운 게 아냐.

▽남=스코시즈가 새로운 감독은 아니잖아. 노장이지.

▽심=그러나 그는 거장이지. 그래서 아쉬운 거지. 이 영화의 한 가지 장점을 꼽는다면, 스코시즈 감독 최대의 매력인 풍부한 양면성이 잘 발휘됐다는 거야. 그의 위대한 점 중 하나는 영화의 행간에 양면성, 삶의 모순을 숨겨놓는다는 거지. 예컨대 ‘분노의 주먹’은 폭력과 파워를 추구하는 남성성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도, 정반대로 남성성을 잃었을 때의 상황에 대한 향수와 연민을 그린 영화로도 읽힐 수 있거든. ‘갱스 오브 뉴욕’도 미국 역사에 대한 비판으로도, 칭송으로도 읽을 수 있잖아. 미국은 혼돈의 와중에 태어나 많은 사람이 피를 흘린 신성한 곳이라는 메시지가 있는 반면, 원주민이라는 게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어. 미국의 현재 상황에 대한 은유처럼 보여. 아랍인, 동양인 이민자를 괄시하고 본토박이인양 으스대는 백인들의 세계조차 섞임과 갈등에서 빚어진 도가니에 불과하다는 따끔한 일성 같기도 하고.

▽남=그런데 그런 이중성이 너무 모호하게 처리되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해. 예컨대 링컨은 위대하고, 흑인노예를 해방하기 위해 싸운 북군은 의롭다는 게 대개의 상식이잖아. 그런데 이 영화에서 뉴욕 빈민들이 징집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킬 때 진압군은 북군이거든. 또 빈민들은 폭동의 와중에서 흑인들을 죽이지. 남북전쟁의 대의는 안중에 없고 흑인들 때문에 왜 우리가 죽어야 하느냐는 입장을 보이잖아. 처음 볼 때는 미국의 역사에 정통하지 않으면 이게 인종주의로 잘못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심=100점 만점에 점수를 주면 얼마나 주고 싶어? 나는 60점.

▽남=나는 80점.

▽심=마지막으로 내기나 걸자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대니얼 데이 루이스가 잭 니컬슨을 제치고 남우주연상 받을 수 있을 것 같아?

▽남=글쎄…. 아카데미가 주변적 영향을 받는 편이니까 ‘갱스 오브 뉴욕’의 손을 들어주지 않을까? 이라크랑 전쟁도 해야 되고 북한도 신경 쓰일 테고, 그런 상황이니 미국적 영화의 주연인 루이스가 받을 것 같은데?

▽심=난 아니라고 봐. 루이스가 뉴욕 토박이 역할을 맡았지만 사실 영국 출신 배우잖아. 미국 사람들이 보면 마치 한국말 열심히 하려고 드는 일본 배우 보는 것 같지 않겠어? 좌우간, 내가 이기면 유진이 분유값 당신이 책임져!

정리=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토론 관전기

영화학자 부부가 한 영화를 두고 갑론을박하는 ‘한 영화 두 소리’ 2회째를 맞은 남완석(우석대 영화과교수), 심영섭(영화평론가) 부부. 영화를 보고 나면 으레 서로 소감을 이야기하곤 했는데, 대담을 시작한 이후로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서로 ‘보안’을 철저히 지키는 태세에 돌입했다고 한다. 심영섭씨는 심지어 한 영화전문지에 자신이 쓴 마틴 스코시즈 감독론도 남편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갱스 오브 뉴욕’을 두 번씩 보고 대담 이전에 두 사람이 교환한 의견은 단 하나. 두 번을 봐야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는 영화라는 것. 다음은 대담 시작 직전의 풍경.

▽남완석=(심영섭씨가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놓은 수첩을 뒤적이자) 어? 그게 뭐야?

▽심영섭=(수첩을 얼른 감추며) 어딜 봐!

▽남=칫∼. 나도 다음부턴 적어올거야. (갑자기 생각난 듯 기자를 바라보며) 참! 대담 타이틀이 1회에 ‘남완석, 심영섭 부부’로 나갔으니까 이번에는 ‘심영섭, 남완석 부부’로 나가면 어떨까요? 이름 순서를 그렇게 번갈아서 가면 좋겠는데.

▽심=(수첩을 내려놓으며) 멋져! 역시 우리 남편이야!

정리=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