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간의 공무원생활을 정리한 지 3년째. 환경청이 만들어지면서 몸담은 이후로 환경처, 환경부로 변모하는 현장에서 20년 이상 일했기에 환경은 내 생활의 전부였다. 새로운 분야의 정책수립에 필요한 이론과 자료를 찾다보니 야간대학원에 들어가게 됐고 해외연수 기회를 얻어 박사과정도 시작했다. 학위를 받은 뒤에는 부족한 환경정책 전문인력 양성을 위해 시간을 쪼개 매 학기 야간대학원에서 한 과목씩 강의를 맡았다.
▼‘환경 공무원’ 접고 사업 시작 ▼
환경부의 조직과 예산은 점점 커지고 어느새 고급간부가 되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세상은 달라지고 공무원의 역할도 변하고 있었다. 경쟁과 변화를 수용하는 데 한계가 있는 공공조직은 구성원들의 역동성과 독창성을 짓누르고 있었다. ‘공무원생활은 티 나지 않게 오래하는 게 제일’이라는 자조 섞인 어느 동료의 말에 처연해지는 내 자신을 보았다. 청운의 꿈을 품고 회색빛 하루 하루를 참아가며 고시를 준비할 때의 그 초심은 어디로 갔는가.
불혹을 넘어 새 세계로의 일탈을 꿈꾼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안정된 직장과 미래를 낯선 세상에서의 불확실한 도전과 맞바꾸는 게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설렘도 있었다. 고교시절 간직해 둔 비밀스러운 꿈을 기억해 냈다. 밴드부 선배가 부는 색소폰 소리를 도서관 창문 너머로 들으며 ‘언젠가는 나도 저걸 해야지’하던…. 그 꿈을 이루면 녹슬어 가는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 새로운 변신에도 성공할 것 같은 확신이 섰다. 색소폰 연주가 일정 수준에 오르면서 나는 젊음의 모든 기억이 간직된 보금자리를 떠났다.
같은 환경분야라도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는 일과 사업을 통해 돈을 버는 일은 완전히 달랐다. 벤처기업 ‘한국팬지아’의 대표를 맡으면서 환경컨설팅 업무를 시작했다. 기업의 환경감사, 환경정책에 대한 자문 요청이 간간이 들어왔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돈이 흐르는 길목에 미리 자리를 잡고 지켜야 한다. 환경분야에 정보통신기술과 지식산업을 접목하는 첨단사업을 하고 있지만 내 기술과 제품에 대한 충분한 수요가 있을 때까지는 견뎌야 했다. 하드웨어가 필요했고 현장과 자금이 필요했다. 하지만 벤처거품은 꺼졌고 신규투자는 말랐다. 판을 좀 더 크게 짜고 싶었다. 뜻을 같이 할 파트너를 찾아 나섰다.
겨울이 깊으면 봄이 가까이 있다던가. 코스닥상장 환경벤처인 ‘환경비젼21’과의 협력체제가 구축됐다. 운신의 폭도 넓어졌고 사업에 탄력도 붙었다. 폐수처리 분야에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기술과 공법을 제공한다는 자신과 각오가 생겼다. 정보통신기술을 적용해 환경관리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는 통합관리시스템에 대한 수요도 곧 가시화될 전망이다. 새 땅에 뿌리는 내렸다.
공직과 사업의 두 영역을 경험하면서 느낀 건 ‘공짜는 없다’는 냉혹한 현실이었다. 보호막과 안전판이 제거된 하루 하루는 팽팽하게 조여진 기타줄처럼 긴장의 연속이었다. 뭔지 모를 불안감에 새벽이면 잠을 깨던 습관이 사라진 건 새생활을 시작하고 반년이 훨씬 지난 뒤였다. 2년 전부터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의 겸직교수를 2년째 맡고 있다. 새로운 영역에서의 생존에 대한 보상은 ‘자유’였다.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고 가지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는 소박한 경제적 자유, 시간을 스스로 조정해 쓸 수 있는 물리적 자유. 그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게 아니었다. 내일의 자유를 위해 오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뼈깎는 노력의 보상은 ‘자유’▼
살면서 적어도 직업을 두 번은 바꿔 봐야 인생의 참 맛을 알 수 있다던 직장 상사가 있었다. 환경을 끈으로 공직과 교직, 사업까지 하고 있는 나는 운이 좋은 셈이다. 꿈을 갖고 키워 가는 사람에게는 운도 따라 온다. 꿈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이루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또 다른 꿈을 키운다.
▼경력 ▼
△환경부 대기정책과장(1995년), 금강환경관리청장(1999년) △㈜환경비젼21 대표이사(2002년) △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2002년)
이선룡 ㈜환경비젼21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