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아카데미는 우울증에 빠졌는가. 그동안 아카데미상은 가슴 울리는 휴머니즘이나 시대의 영웅상을 묘사한 작품에 후한 점수를 줘왔다. 그러나 올해 작품상 후보작을 보면 이같은 ‘아카데미 취향’을 찾아보기 어렵다. ‘디 아워스’는 여주인공들이 자살을 기도하고, ‘피아니스트’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휘말린 피아니스트의 삶에 대한 갈증을 그렸다. ‘갱스 오브 뉴욕’은 피를 토대로 세워진 뉴욕의 건설사를 그렸고 뮤지컬 영화 ‘시카고’도 살인범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1930년대 혼돈의 미국 사회를 담았다. ‘반지의 제왕:두개의 탑’도 절대반지를 얻는 게 아니라 버리려는 상황을 통해 절대 권력의 위험을 고발한다는 점에서 ‘아카데미 취향’과 어긋나 있다. 이들 작품상 후보작들의 이면에 깃든 메시지를 들춰봤다.》
●허물어지는 미국의 낙관주의
이 영화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코드는 ‘죽음’이다.
‘디 아워스’에서 여자 주인공들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실존적 회의를 거듭한 끝에 자살을 기도한다.
‘피아니스트’에서도 한 피아니스트가 대량 학살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끝에 ‘단지 살아 있다는 것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런 류의 영화가 휴머니즘의 승리로 끝맺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죽음을 바라보는 개인의 담담한 시선에 초점을 맞췄다.
이같은 경향은 9·11 뉴욕 테러 이후 미국인들에게 닥쳐온 심리적 공황의 반영이다. ‘비명횡사’가 더이상 남의 일이 아니라 흔하고 일상적인 일이 되버린 것. 영화평론가 전찬일씨는 “20세기 절대 강자로 군림했던 미국이 9·11 테러 이후 거대 담론보다 삶의 근본적인 문제에 눈을 돌리게 됐다”고 말했다.
서울대 영문과 김성곤 교수는 “미국 낙관주의의 붕괴는 세계 대전 이후 1950년대 ‘비트(Beat) 제너레이션’의 등장과 같은 맥락”이라며 “수천년간 쌓아올린 문명이 하루 아침에 잿더미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고 이는 자연스럽게 죽음과 연결된다”고 말했다.
●현실도피와 시대물의 부상
그러나 이 영화들은 죽음을 불가피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싫다”며 이중적 성향을 드러낸다. 심지어 미학적으로 그려내며 현실 도피를 인정한다.
현재를 배경으로 하지 않은 시대물 자체가 죽음에 대한 이중적 성향을 담고 있다. 시대물은 이미 경험한 ‘안정된’ 과거인데다 그 자체가 비현실이라는 것이다. ‘디 아워스’는 1923년, ‘피아니스트’는 1930∼1940년대, ‘갱스 오브 뉴욕’은 1840∼1860년대, ‘시카고’는 1920, 1951, 2001년 배경이다. ‘반지의 제왕’은 시대마저 모호하다.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현실의 절망이 크면 클수록 사람들은 비현실에 대해 갈망하게 된다”며 “70년대 석유위기로 미국 경제가 악화됐을 때 ‘위대한 개츠비’ ‘스팅’처럼 과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나온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했다.
‘시카고’는 죽음을 미학적으로 그렸다. ‘셀 블럭 탱고’를 부르는 장면에서는 여섯명의 여죄수들이 경쾌한 노래와 화려한 율동으로 살인을 하게된 이유를 밝히기도 한다.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는 “‘시카고’는 1930년대 혼란스런 사회상을 노래와 춤으로 희석시켜 살인과 분노를 가십(gossip)으로 처리했다”고 말했다.
●흔들리는 '팍스 아메리카나'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작의 이같은 성향은 미국식 우월주의가 한계에 봉착했음을 드러낸다.
‘반지의 제왕’ 2편이 대표적인 사례. 이 영화에서 주인공 프로도는 절대 반지를 버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과정에서 프로도가 겪는 내면 갈등은 세계의 강자로 군림해온 미국이 절대 권력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는 것과 상통한다.
상명대 영화학과 조희문 교수는 “그동안 아카데미에서 환영받지 못하던 우울한 영화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팍스 아메리카나’의 한계를 알리는 신호탄”이라며 “앞으로는 해피 엔딩을 골자로 한 ‘미국적’ 영화가 더이상 범세계적으로 각광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