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6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아침식사 기도는 유난히 길었다. 미 합중국 대통령이 관례적으로 참석하는 제 51회 연례 국가조찬기도회(National Prayers Breakfast) 때문이었다. 이날 그는 9분에 걸쳐 “이 나라는 기도의 나라입니다(this is a nation of prayer)” 등의 내용으로 열띤 ‘강론’을 펼쳤고 참석자들은 다섯 번이나 우레 같은 박수로 연설을 멈추게 했다.
종교전문웹진 ‘빌리프넷’의 데보라 콜드웰 프로듀서는 이 날 연설의 마지막 부분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모든 삶과 역사에는 신의 손에 의해 정해진 목적과 헌신이 있다”고 말한 대목이었다. 그녀는 곧 부시 대통령의 신앙관을 분석하는 기사를 빌리프넷 홈페이지(belief.net)에 올렸다. ‘진화하는 신앙’이라는 제목의 이 기사에서 콜드웰씨는 부시가 개인의 영적 자각에 가치를 두는 감리교인(Wesleyan)에서 예정된 신의 계획을 수행하는 데 삶의 무게 중심을 두는 칼뱅주의자(Calvinist)로 옮아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녀가 대통령의 ‘종교적 변화’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명확했다. “그 변화가 테러리즘과 이라크, 대통령직에 임하는 자세에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라크에 전운이 감도는 요즘, 부시 대통령은 과연 무엇을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예정설 믿는 칼뱅주의자?
부시 대통령이 성경을 인용하거나 비유하는 일은 9·11 테러 이후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테러 직후 한 기자회견에서 ‘십자군전쟁(crusade)’이라는 말을 쓴 일은 즉각 거센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팔레스타인 비르제이트대의 로저 히코크 교수(역사학)는 “무엇이든 문자 그대로 이해하려는 습성의 중동인들에게 부시 대통령의 ‘십자군’ 발언은 곧바로 7만여명의 무슬림이 학살된 1099년의 예루살렘 정복을 의미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대국민연설에서 성경을 인용하거나 기독교적인 비유를 한 대통령이 부시가 처음은 아니다. 링컨은 성경을 누구보다도 자주 인용한 대통령으로 꼽힌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1912년 진보정당을 상대로 한 연설에서 “우리는 지금 아마게돈(성경의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선과 악이 마지막 결전을 벌이는 곳)에 직면해 있으며 주님(the Lord)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까지 말했다. 카터도 레이건도 클린턴도 성경인용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종교사회학자들은 이들의 성경인용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비하면 그야말로 ‘꾸밈음(grace note)’에 불과하다고 해석한다.
부시는 대통령선거전 동안에는 자신의 종교적 성향이 드러나는 데 민감했다. 이전의 텍사스 주지사 선거를 치르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로 지역의 무슬림 등 비 기독교인들로부터 원성을 산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선 이후 특히 9·11 테러 이후로는 부시 대통령이 자신의 대통령 출마와 당선을 ‘저 높은 곳으로부터의 부름’으로 이해해 왔다는 고백과 증언이 잇따랐다. 부시 대통령의 지지자이자 미국 남부침례교총회 지도자인 리처드 랜드 목사는 “1999년 당시 주지사이던 부시 대통령을 만났을 때 그가 ‘하나님이 제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고 믿습니다그러나 만약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괜찮습니다’라고 말했다”고 밝혔다.
뉴스위크 최근호 보도 등에 따르면 부시 대통령이 종교적으로 각성한 것은 30대 후반 성서읽기 모임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현재 상무장관인 친구 존 에번스의 권유로 부시는 1970년대말 남성 10명이 성경의 신약을 강독하는 모임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부시의 성경읽기 참여는 당시 미국 베이비붐 세대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소규모 종교공동체 운동의 한 갈래였다. 성경읽기는 부시 대통령의 삶을 바꾸었다. 그는 40세 생일 직후인 86년 “술을 끊겠다”고 선언했고 “기독교인으로 거듭났다.”
캐나다 리자이나대 오강남 교수(비교종교학)는 “미국의 종교문화적인 맥락에서 ‘거듭났다’는 고백은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대개 방언 등으로 예수의 존재를 ‘체험’했다는 의미”라며 “거듭 난 기독교인의 특징은 예수를 마치 가족이나 친구처럼 실재하는 존재로 가까이 느끼며 근본주의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국 개신교에서의 근본주의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 죽은 뒤의 육체적 부활 등이 모두 은유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이다. 오 교수는 “근본주의라는 말의 부정적 어감 때문에 흔히 복음주의자(Evangelical), 거듭난 기독교인(born-again Christian)이라고 부르며 이 원리주의적 태도에는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이 분명하게 구분된다고 믿는 이분법이 특유의 사고방식”이라고 설명했다.
● 창조론 믿는 미국인이 진화론 신봉의 두배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니컬러스 크리스토프는 최근 ‘신, 악마 그리고 미디어’라는 칼럼에서 “대부분의 미국 저널리스트들이 46%의 미국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46%란 바로 지난해 12월 갤럽이 실시한 조사에서 자신을 ‘복음주의자 또는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이라고 답한 사람들. 부시 대통령도 이 46%에 속한다.
CIA의 월드팩트북 2002년판은 89년 통계를 기준으로 미국민의 종교적 구성에 대해 개신교 56%, 가톨릭 28%, 유대교 2%, 기타 4%, 무신론자 10%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갤럽의 최근 조사결과는 미국이 ‘다종교 국가’인가에 의문을 갖게 한다.
갤럽 조사에 응한 대상자 중 48%가 창조론을 믿었다. 진화론 신봉자는 그 절반수준인 28%에 불과했다. 악마(devil)의 존재를 믿는 미국인은 68%나 됐다. 조지 W 부시 대통령도,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도 공개적으로 진화론을 믿지 않는다고 말해왔다.
크리스토프씨는 칼럼에서 부시 대통령도 레이건 대통령도 종교적으로는 ‘전형적인 미국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미국 동북부에 사는 교육받은 엘리트들이 이국풍 유행으로 성경보다는 우파니샤드에 빠져있건 말건, 그들이 자국의 앨라배마보다는 아프가니스탄의 종교상황에 더 관심을 기울이건 말건, 대중은 종말론을 다룬 ‘남은 사람들(left behind)’을 5000만권 이상 사 보는 것이 미국의 종교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46%의 ‘복음주의자와 다시 태어난 기독교인’이 부시 행정부에서는 대통령을 정점으로 미국사회의 변두리에서 주류가 된 점이라고 크리스토프씨는 지적했다.
‘문명의 충돌’의 저자 새뮤얼 헌팅턴은 20세기말의 지배적 사회조류로 ‘모든 대륙, 모든 나라, 모든 문명에서 예외없이 종교가 부활한 현상’을 꼽았다. 이 종교부활에서 또 하나의 공통된 현상은 세속과 타협하지 않고 교의의 원리에 충실하게 개인과 사회를 뜯어고치려 하는 원리주의가 득세한다는 것이다.
9·11 이후 테러집단의 정신적 지표가 되고 있는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은 집중적으로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이 전쟁의 또 다른 주인공인 미국에서도 90년대 이후 급격히 근본주의적인 색채의 기독교 부활현상이 진행되고 있다는 데 대해서는 그만큼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부시 대통령은 혼자가 아니다. 이제 미국의 지식인들은 새삼스레 자국 안에서 진행되는 ‘문명 충돌’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정은령기자 ry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