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화/로저 에버트 지음/최보은 윤철희 옮김/616쪽/1만5000원/을유문화사
가끔 할리우드에서 건너온 영화의 평을 쓸 때 ‘IMDB’ 사이트를 뒤적거린다. ‘인터넷 데이터 베이스 무비’의 줄임말인 이 사이트에는 기본적인 정보와 관객들의 반응이 적혀 있다. 좀 더 소상한 견해를 얻고 싶을 때는 왼쪽 바에 있는 리뷰 사이트로 마우스를 움직인다. 수많은 리뷰 중 어김없이 클릭하는 곳은 ‘시카고 선 타임스’의 로저 에버트의 글이 실린 사이트다. 영화는 보편성이 강한 대중 예술이지만 한편으로 문화적 특성을 지닌 것이어서 할리우드에서 흥행한 영화가 국내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할리우드 영화에 관한 미국 평론가의 글을 읽는 것은 흥미롭다.
이러한 인연으로 몇 년째 에버트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그의 균형감각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미국에도 잘 나가는 영화 전문 기자나 저널리스트들은 많다. 케네스 튜란, 데이비드 얀센, 피터 트레비스 등. 에버트의 글이 이들에 비해 보수적인 성향인 것은 사실이지만 영화를 대하는 애정이나 섬세함에서는 남다른 노익장을 과시한다. 1967년서부터 기자로 ‘시카고 선 타임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한 매체에 36년간 글을 쓴 것이 된다. 현존하는 미국 영화 저널의 산 증인인 셈이다. 쉰이 넘은 평자를 거의 보기 힘든 한국으로서는 놀라운 풍토다. 그 밖에도 에버트는 강의와 방송을 오가며 정력적인 활동을 중단하지 않는다.
‘위대한 영화’는 에버트의 여러 책 중 제목 그대로 위대한 고전 영화를 주로 다룬 책이다. 에버트는 치열한 현장비평가이면서도 지나간 시대의 고전들을 되새기며, 종종 근작들과 대결시킨다. ‘다크 시티’의 비주얼에 자극 받아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꺼내들고 고전의 위대함과 이중성을 갈파하는가 하면, ‘우리에게는 내일은 없다’를 틀어놓고 후대를 잇는 ‘황무지’ ‘천국의 나날들’ ‘델마와 루이스’ ‘올리버 스톤의 킬러’ 등을 떠올린다.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것은 글쓰기를 업으로 삼으며 수십번 보았던 ‘카사블랑카’의 매력을 명쾌한 관점으로 제시하는 대목들이다.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면 ‘카사블랑카’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근본적으로 일자 룬드의 역할은 위대한 남자의 연인이자 동료다. ‘카사블랑카’가 던지는 진정한 질문은 그녀가 동침해야 할 위대한 남자는 어느 쪽이냐 하는 것이다.” 일자 룬드 역을 맡은 잉그리드 버그만의 갈등과 행위를 현대적인 관점에서 해석해내는 위트 있는 문장을 읽으면서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이러한 해석은 그의 글에서 자주 드러나는 윤리적인 태도이다. 이를 통해 에버트는 저널 특유의 균형감각을 이끌어내고 독자들의 견해를 물으며 생각할 여지를 배려한다.
아무려나 이 책에는 일본 감독인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 유럽의 거장 페데리코 펠리니의 ‘달콤한 인생’뿐만 아니라 ‘안달루시아의 개’와 같은 실험영화나 ‘스타워즈’ 시리즈와 같은 장르 영화의 모범들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 다양한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위대한 영화’는 어디까지나 에버트의 기준이다. 하지만 취향을 담백하게 드러내는 관록 있는 글솜씨는 영화보다 더 재미있고, 깊이 있는 시각을 보여준다.
이상용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