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이봉주’남자부 우승을 차지한 남아공의 거트 타이스(오른쪽)와 역대 국내대회 3위 기록으로 아쉬운 2위에 그친 지영준(코오롱)이 레이스 막판 치열한 선두다툼을 벌이고 있다. 특별취재반
소문난 늦잠꾸러기 소년은 늘 학교까지 10여리 길을 뛰어가야 했다.
아침잠이 많아 일어나면 통학버스는 이미 떠난 뒤. 선생님의 꾸중이 무서웠기에 아침도 거른 채 그는 툭하면 5㎞ 떨어진 학교까지 뛰어다녔다. 그 소년이 한국 남자마라톤의 샛별로 자랐다.
16일 열린 2003 동아서울국제마라톤 겸 제74회 동아마라톤대회에서 2시간8분43초를 기록, 거트 타이스(남아프리카공화국)에 1초 차로 2위에 그친 지영준(22·코오롱). 봄비가 내린 탓에 한국최고기록(2시간7분20초)엔 못 미쳤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최고기록(2분9분48초)을 끌어올린 것에 한껏 고무돼 있었다.
▼관련기사▼
- 황규훈 건국대 감독 “지영준 성장 큰 소득”
- ‘주연’이 된 ‘조연’…남자우승 거트 타이스
- “국제대회 첫 우승 기뻐”…여자우승 장수징
- 19살 엄효석, 20㎞ 선두질주 기염
- 김이용, “오늘 레이스로 자신감 회복”
“4개월 만에 내 기록을 1분5초나 앞당긴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내 목표는 차근차근 세계 최고기록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까 목표를 이룰 시간은 충분합니다.”
그의 고향은 충남 부여군 초촌면 초평리. 부모가 아침 일찍 논으로 나간 뒤에도 늦잠을 자던 그는 하루 한번밖에 없는 통학버스를 번번이 놓쳐 석성면에 있는 석성중학교까지 뛰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다리에 힘이 붙었고 심폐기능도 향상됐다. 늦잠 덕에 마라토너에게 꼭 필요한 두 가지를 얻은 셈이다.
‘마라톤 천국’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출발한 8000여명의 마라토너들이 시청 앞 광장까지 거대한 ‘인간띠’를 이루며 달리고 있다. 특별취재반
육상대회에 처음 출전한 것은 중 3때. 그의 재질을 눈여겨본 체육교사가 대회에 출전하면 체육점수를 잘 주겠다고 한 것이 계기가 됐다. 부여시민체육대회 800m, 1500m에서 2위를 차지한 그는 이어 도대회 3000m에서 우승하며 본격적인 육상선수의 길을 걷게 된다.
충남체고 시절엔 출전하는 대회마다 5000m를 석권했고 이 때문에 ‘한국 마라톤의 대부’ 고 정봉수 감독의 눈에 띄어 2000년 코오롱에 몸담았다. 정 감독이 2001년 작고했으니 지영준은 정 감독의 ‘유작’인 셈이다.
지영준은 지난해 제대로 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중앙일보 마라톤에 출전해 3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확인했다. 풀코스 세번째 출전인 이번 동아마라톤은 제대로 훈련해서 처음 뛰는 대회. 중국 쿤밍에서 ‘지옥의 고지훈련’을 마쳤고 컨디션 조절도 잘했기에 기록 단축은 자신이 있었다.
“비만 안 왔어도 충분히 한국최고기록에 근접할 수 있었습니다. 비 때문에 체온이 떨어지고 다리가 굳어 레이스 후반에 너무 힘들었거든요.”
지영준은 각종 대회 상금과 꼬박꼬박 부은 적금으로 지난해 고향에 계신 부모님에게 28평짜리 집 한 채를 지어줄 정도로 효자. 마라톤을 통해 오늘의 지영준이 있게 된 만큼 그의 마라톤 사랑은 유별나다.
그의 다음 목표는 8월에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월계관을 쓰는 것. 이어 내년 아테네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고 한국선수 최초로 2시간6분대 기록을 세우는 게 최종 목표다. 이 같은 꿈★이 있기에 한국마라톤도 희망이 보인다. 특별취재반
▼숨막힌 트랙싸움… 결승선 50m전 “아…”
105리 길을 달리는 마라톤이지만 승부는 마지막 400m의 트랙싸움에서 갈렸다.
2003 동아서울국제마라톤 골인 지점을 눈앞에 두고 벌인 거트 타이스와 지영준의 트랙싸움은 마라톤의 진수를 보여준 장면. 비가 내리는 가운데서도 관중들은 대회의 대미를 장식한 이 숨막히는 대결을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봤다.
트랙싸움 하면 떠오르는 장면이 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서 이봉주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조시아 투과네가 벌인 막판 대결. 당시엔 투과네가 처음부터 앞서 가고 있는 가운데 이봉주가 안간힘을 다해 뒤를 쫓는 상황으로 진행됐다. 결과는 3초 차로 투과네가 1위.
16일 타이스와 지영준이 벌인 막판 트랙싸움도 이에 못지 않은 명승부였다. 잠실운동장 안으로 막 진입하는 결승선 400m 앞에서 먼저 스퍼트를 끊은 선수는 지영준. 지영준은 트랙을 반 바퀴 남겨놓을 때까지 타이스를 앞서며 우승을 거머쥐는 듯싶었다.
그러나 타이스는 역시 노련했다. 그는 결승선 앞 200m 지점에서 스퍼트를 해 70m 지점에서 지영준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70∼50m 지점은 뒷심싸움. 두 선수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내며 안간힘을 다했다. 그러나 타이스가 마지막 싸움에서 지영준을 앞서자 관중들은 “아∼” 하고 아쉬움을 토해냈다.
기록은 불과 1초 차. 지영준은 경기를 마친 후 “타이스는 역시 나보다 한 수 위였다”며 “순발력과 스피드를 더 길러 다음에는 결코 당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특별취재반
▼“지영준, 내년 6분대 기록 도전”…정하준 코오롱감독
“지영준은 달리는 폼을 조금 고치고 스피드를 강화하면 2시간6분대까지 가능합니다.”
2003동아서울국제마라톤을 통해 지영준을 한국 남자마라톤의 ‘차세대 주자’로 키운 정하준 코오롱 감독(52)은 한국 마라톤 대부 고 정봉수 감독의 후계자. 한국 마라톤을 세계 최강으로 올려놓은 고인으로부터 99년부터 체계적으로 지도자 수업을 받았다.
정하준 감독은 정봉수 감독이 세상을 뜬 2001년부터 지영준을 집중 조련했다. 고인이 황영조와 이봉주를 키웠을 때 했던 지도방식대로였다. 이번 대회에 앞서 경북 김천에 있는 정 감독 묘소에 들려 “일을 내겠다”고 약속을 하고 올 정도로 고인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정하준 감독은 마라톤에 스포츠 과학을 접목시키는데에도 적극적이다. 세계수준으로 다가서기 위해선 고지대훈련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고 이번 대회에 앞서 중국 쿤밍에서 강도 높은 고지훈련까지 했다. 지영준이 4개월만에 1분이상 기록을 단축할 수 있었던 것도 정 감독의 이같은 노력 때문.
정 감독은 “빨리 2시간6분대에 들어야 세계수준에 근접할 수 있다. 내년까지 영준이 기록을 2시간6분때까지 끌어 올리겠다”고 말했다.
특별취재반=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2003동아서울국제마라톤 순위 ▽남자부순위이름소속기록1거트 타이스남아공2:08:422지영준코오롱2:08:433지미 무인디케냐2:08:534음바렉 후세인케냐2:09:575로버트 체루이요트케냐2:10:346다케이 류지일본2:11:557일라이자 무타이케냐2:12:378정윈산중국2:13:209이명승삼성전자2:13:4210박주영삼성전자2:15:17
2003동아서울국제마라톤 순위 ▽여자부순위이름소속기록1장수징중국2:23:182워르크네시 톨라에티오피아2:25:423최경희경기도청2:30:574알리나 이바노바러시아2:33:525이은정충남도청2:35:186오정희삼성전자2:35:527메세레트 코트에티오피아2:36:328정복은청주시청2:37:289오이시 리나일본2:37:4010정윤희서울도개공2:38: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