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발레단에서 발레리나로 일한 지 6년째. 열 살 때부터 시작한 발레는 어느덧 내 인생의 중심이 됐고 나는 발레를 통해 참으로 많은 인연을 맺어 왔다.
그중에서도 마리나 레오노바 선생님(현 러시아 볼쇼이 발레학교 교장)은 잊을 수 없는 분이다. 나는 선화예중 3학년이던 92년 러시아 볼쇼이아카데미로 유학을 떠났다.
열네 살 어린 나이의 러시아 유학 생활은 낯설고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러시아어를 전혀 할 수 없는 데다 당시 볼쇼이아카데미에는 외국인 학생이 거의 없어 매일 밤 홀로 이불 속에서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는 무용뿐 아니라 정규 수업도 받아야 했다. 그런데 글자도 읽지 못하는 상황인데 문학 시간에 ‘로미오와 줄리엣’ 토론을 한다는 게 아닌가. 나는 5쪽 분량의 자료를 발음만 적어서 밤새도록 외웠고 수업시간에 처음부터 끝까지 읊어댔다. 처음에는 나를 차갑게 대하던 레오노바 선생님은 “이렇게 지독한 학생은 처음”이라며 칭찬해 주었다.
1996년의 어느 날, 큰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볼쇼이아카데미는 외국인 학생을 볼쇼이극장에 좀처럼 세우지 않았는데 레오노바 선생님이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를 무대에 올린 것이었다. 나는 ‘파키타’란 작품의 주인공으로 몸이 부서져라 뛰고 날았다. 공연이 끝나고 볼쇼이아카데미 관계자들은 이례적으로 박수 갈채를 보내 주었다. 무대 뒤편에서 선생님과 나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이듬해 졸업할 때 선생님은 자신이 발레리나로 활동할 당시 사용했던 ‘백조의 호수’의 흑조 깃털을 나에게 선물했다. “학교에서 배운 아름다운 마음을 잃지 말라”는 당부와 함께. 지금도 나는 ‘백조의 호수’ 공연이 있을 때면 레오노바 선생님의 흑조 깃털을 쓰고 무대에 오른다. 레오노바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과 따끔한 충고를 통해 진정한 예술이 무엇인지를 배웠다. 이제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아름다운 춤으로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다.
김주원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