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렇다. 물론 경우에 따라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될 때도 있다. 우리는 그것을 삶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도 거짓말은 대부분의 경우 해서는 아니 된다.
정말을 말해야 하는가. 글쎄…. 물론 정말을 말해야 할 때도 당연히 있다. 그러나 정말은 말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좋은 경우가 훨씬 많다. 그것도 우리는 삶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나는 저 남자가, 또는 저 여자가 싫다. 주는 것 없이 보기 싫다. 그것이 내 마음의 진실이요, ‘정말’이다. 그렇대서 나는 그(녀) 앞에서 또는 다른 사람 앞에서 그(녀)를 싫어한다는 정말을 말해야 하는가.
▼“누구는 못믿겠다”…“넥타이 싫다”▼
동료가 혹은 상사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못 믿을 수도 있다. 사실 세상에는 믿을 수 있는 사람보다 못 믿을 사람이 훨씬 많다. 그러나 그렇대서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맞대놓고 혹은 제3자 앞에서 믿지 않는다고 정말을 말해야 하는가. 말해도 되는가.
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을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김정일은 조금도 좋아하지 않지만, 미국 대통령이 국빈 방문한 한국 대통령 앞에서 “나는 김정일을 믿지 않는다”고 TV생중계로 정말을 말했을 때 어떤 당혹감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그것도 동양과 서양의 차이인가. 우리는 궂은 말뿐 아니라 좋은 말도 내놓고 말하면 어쩐지 위화감 같은 것을 느낄 때가 많다. 요즈음 젊은 세대는 몰라도 우리들 늙은 세대에겐 “난 당신을 사랑하오”란 말은 영화나 번역 소설에서나 만나는 생소한 진실 고백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말에 “날것으로서의 사실은 허위보다도 허위”라는 말이 있다. 벌거벗은 진실은 거짓보다도 더 거짓일 수 있다는 얘기다. 성애(性愛)는 사랑의 진실일 수 있다. 그러나 포르노그래피에서 보여주는 날것으로서의 성애는 허위보다도 더 허위이다. 사랑은 언제나 벌거벗은 성애의 ‘사실’ 이상의 것이다.
내가 아는 저명한 피부과 의사 한 분은 그림을 좋아해서 수집한 작품을 연구실에 바꿔가며 걸어두곤 한다. 한번은 낯선, 그러나 아주 잘 짜인 추상화가 벽에 걸려 있기에 누구 작품이냐고 물어봤다. 그건 그림이 아니라 사람의 피부 조직을 현미경으로 확대한 컬러 사진이란 말을 듣고 나는 감동 같은 걸 느꼈다.
날것으로서의 사실이란 이처럼 추상적이란 말인가. 현미경으로 탐사한 가장 구체적 사실이야말로 가장 추상적일 수 있다는 것인가 하고….
어느새 장관이나 대통령보다도 나이가 많은 늙은이가 돼 버렸다. 그렇대서 진실 앞에 약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다. 다만 소화기능이 저하되어 가는 탓에 음주량이나 식사량이 줄어드는 것처럼 진실을 소화하는 양도 확실히 줄어들고 있다. 나는 아침마다 배달되는 수십 쪽이나 되는 신문의 사실 보도를 모두 소화해낼 능력이 없다. 더욱이 밤이 되면 TV에서 무좀 난 발바닥의 진실, 썩은 이와 곪은 잇몸의 구강(口腔) 안 진실, 내시경으로 들여다본 역겨운 식도며 위장의 진실을 보여주는 화면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서 소화할 비위가 없다. 그뿐만 아니라 비행기 참사나 지하철 참사에 혈육을 잃고 통곡하는 유족들의 흐트러진 모습을 근접 확대 촬영해서 곡성과 함께 보여주고 들려주는 ‘진실’ 보도의 소화도 나는 감당하기 힘들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대북 포용 정책은 이어가되 ‘햇볕정책’이라는 말을 버리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한 가지 더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앞으로 다시 남북의 이산가족들이 상봉하게 될 경우 이제는 기막힌 사연을 가진 수백명의 혈육들을 한 강당에 몰아넣고 통곡의 해일(海溢) 장면을 TV로 생중계하는 벌거벗은 ‘진실’의 ‘쇼업’만은 안 해 주었으면 좋겠다. 과거 서독의 성공적인 동방정책으로 헤어진 동서독 주민들이 수백만명 규모로 상호 방문하고 재회와 작별의 정을 나누곤 했으나, 집단적으로 만나 가장 사사로운 감정을 공개리에 폭발시켜 일반 대중에게 구경시킨 일은 없었다.
▼그렇게 드러내 얘기해야 하나 ▼
벌거벗은 감정의 알몸에는 옷을 입혀 가려 주는 것이 좋다. 대통령이 자기가 거느리는 정부의 일부를 못 믿겠다고 국민 앞에서 꼭 정말을 말해야 하는 것인가. 장관이 공석에서 넥타이를 풀어 젖히고 정장이 답답하다고 정말을 말해야 하는 것인가. 이 늙은이는 알 수가 없다. 그 정말을 다 소화할 수가 없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