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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10년만에 고국서 개인전 여는 재미조각가 '존배'

입력 | 2003-03-18 18:27:00



《손톱길이 만한 짧고 가는 철사 수십만개를 용접으로 이어붙여 정교한 입체를 만드는 재미 조각가 존 배(66·한국이름 배영철·사진). 그의 작품을 보면 ‘철’이라는 차가운 소재가 한 인간의 노동과 감수성으로 이렇게 따뜻하고 감성적인 소재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그는 열다섯 살에 홀홀단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Pratt Institute) 에서 디자인과 조각을 공부한 뒤 스물 일곱에 이 학교 최연소 교수가 됐다. 지금은 용접조각 분야에서 세계적인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10년만에 한국을 찾은 그를 전시장인 서울 태평로 로댕갤러리에서 만났다. 환갑이 넘은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단단한 체구에 맑은 얼굴이었다. 영어투가 섞이긴 했지만 50여년이 넘은 이국생활에도 한국말 구사는 완벽했다. 무엇보다 낮고 느린 어조로 그가 내뱉는 언어는 책에 나오는 죽은 언어가 아니라 체험으로 터득한 살아있는 언어였다. 3차원을 생각하는 조각가적 사유에 조수 한 사람 없이 하루 10시간 이상 용접에 매달리는 ‘노동하는 작가’라는 점이 그의 언어를 살아 있게 만드는 원동력일 지 모른다고 기자는 생각했다.》

―철이라는 소재의 매력은?

“조각가에게 소재는 음악가에게 악기와 같다. 플래스틱도 해 보고 납도 해 보았는데 철이 가장 맞았다. 돌이나 나무도 좋았지만 쓰레기가 많았다. 철은 버리는 게 없다. 또 점(點)에서 시작해 선(線), 면(面) 으로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다.”

철을 최대한 잘게 쪼갠 철사로 시작하는 작업은 그에게 무한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작품마다 느껴지는 운동성과 리듬감, 유연함과 부드러움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수많은 선들이 다른 선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한 ’길의 무게 (Weight of the way). 용접조각가 존 배의 이 작품은 수많은 만남과 이별을 통해 변하는 우리네 인생 길을 상징한다. 타원형의 모양은 작가가 일부러 만든 것이 아니라 점점 위로 뻗어 가던 철의 무게가 빚은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한다. 사진제공 로댕갤러리

초기작 ‘무제’(1968) 앞에 섰다.

부드러운 표면이 마치 섬유를 이어 붙인 것 같다. 또 빛의 방향에 따라 음영이 달라져 정면에서 보면 연필로 그린 세밀화같다. 그는 3∼4년 동안 이 작품을 만들면서 비로소 ‘철’이라는 소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회선(Involution·1974)’ ‘포선’(Convolution·1976) 등 한 줄의 포물선으로 이어진 작품들은 시작과 끝, 안과 밖이 없다. 강하고 단단한 ‘명료한’ 철이라는 소재를 통해 구분과 경계를 없앤 유연성을 표현한 것이다. 10여년 이런 작업에 몰두하던 그는 고민에 빠진다. ‘철의 성질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작업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나온 것이 큐브작업이다.

“철사로 만든 큐브 하나하나를 이어 붙이면서 ‘되어 가는 대로’ 만들기 시작했다. 비뚤어지면 비뚤어지는 대로 곧게 가면 곧게 가는 대로 말이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마음이 풀어졌다. 마음이 풀리면서 작품도 움직였다. 작업하는 일이 하나의 종교 의식 처럼 느껴졌다. ”

3∼4년의 작업기간이 걸린 하나하나의 작품엔 절실한 사연들과 깊은 사유가 담겨 있다. ‘양반’이나 ‘보이지 않는 숲’에선 어린 나이에 낯선 땅에서 사무친 향수(鄕愁) 가 담겨 있고 수많은 선들이 다른 선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을 반복한 ‘길의 무게’ (Weight of the way) 는 만남과 이별을 통해 변하는 인생 길을 상징한다.

가벼운 농담같은 사연을 담은 것도 있다. ‘개꿈’은 값도 못 받고 작품을 잃었을 때 화를 삭이기 위해 파지가 된 원고지를 형상화한 것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Yet Unborn)’은 아이가 안 생겨 고민하는 딸을 생각하며 가는 철사를 남자의 정자 형상으로 만들어 이어 붙인 것이다.

그에게서는 구도자적 분위기가 난다. 생명없는 것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에고와 싸웠다는 그를 보면, 삶이란 인간들끼리의 ‘관계’를 통해서만 터득할 수 있다는 오랜 선입견이 무너진다. 물성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사유와 체험은 깊고 넓어질 수 있는 것이다.

40년 조각인생을 담은 그의 전시가 ‘존배 조각, 공간의 시학’이란 제목으로 5월18일까지 열린다.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21점이 나온다. 입장권은 어른 4000원, 초 중 고교생 2000원. 02-2259-7781

허문명기자 angelhu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