텍사스 오스틴의 델 본사.
《지난달 미국 델컴퓨터의 2002년 4·4분기(10∼12월) 실적 발표는 정보기술(IT)업계는 물론 전 세계 투자자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IT업계의 계속되는 불황에도 델컴퓨터의 매출액은 오히려 큰 폭의 증가세를 보였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2002년도 순익은 21억달러로 전년도 같은 기간에 비해 19% 증가했다. 매출액도 14% 증가한 354억달러로 집계돼 시장을 놀라게 했다.》
▽원하는 모습 그대로, 빠르게, 편하게〓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마이클 델 회장은 “좋은 제품을 더 싼값에 공급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범한 이야기이지만 델컴퓨터만의 최대 무기이기도 하다. 150여개의 특허를 갖고 있는 델컴퓨터만의 독특한 생산전략이 바로 그것.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북쪽의 라운드록에 자리잡은 델컴퓨터 공장. 여러 종류의 컴퓨터가 빠르게 조립되고 있었다. 고객의 다양한 욕구와 취향에 맞게 개별적으로 컴퓨터를 주문생산하고 있는 것. 자연스럽게 사양과 용량, 옵션, 소프트웨어의 종류에 따라 설계된 ‘나만의 제품’이 시시각각 탄생한다. 또 완제품은 창고에 쌓일 시간도 없이 소비자에게 곧바로 배송된다.
인터넷의 남다른 활용도 큰몫을 했다. 델컴퓨터는 소매점이나 대리점을 갖고 있지 않다. 인터넷이나 전화, 팩스 등을 통한 맞춤식 통신판매가 전부다. 직판모델(direct model)을 통해 유통 과정의 사슬을 모두 없애버린 것이다. 후기 IT(Post IT)를 대비한 마케팅전략이다.
▽‘시장이 제일 좋을 때 가볍게 끼어든다’〓델컴퓨터가 후기 IT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또 다른 전략은 ‘시장이 확대되는 시점에 정확히 뛰어든다’는 것이다.
델컴퓨터는 신제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대신 경쟁업체가 새 제품을 개발해 시장이 개척되는 과정을 주도 면밀히 살핀다. 이후 동종업체간 경쟁이 시작되고 생산단가가 낮아지면 델컴퓨터는 비로소 생산을 시작하는 식이다.
이는 델컴퓨터가 외부의 비판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거액이 들어가는 연구개발(R&D)에는 뒷짐지고 있다가 남들이 창조한 신기술의 열매는 얄밉게 따먹는다는 지적이다. 실제 델컴퓨터의 한 해 연구개발비는 4억4000만달러(약 5200억원)로 경쟁사인 휴렛팩커드(HP)가 투자하는 40억달러의 10분의 1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 라운드록에 위치한 델컴퓨터 공장에서 한 직원이 컴퓨터를 조립하고 있다. 조립라인 앞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는 컴퓨터를 주문한 고객이 희망한 내용이 출력된다. 직원은 이에 따라 고객이 원하는 대로 다양한 제품을 조립할 수 있다. 사진제공=델컴퓨터
그러나 델컴퓨터는 이런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지금까지 여유 있게 받아넘겨 왔다. 당장 수익이 나지 않는 R&D에 거액을 투입하는 것은 주주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게 회사의 확고한 방침이다. 소비자가 어떤 브랜드를 원하고 또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그때 제품을 만들어도 늦지 않다는 설명이다.
이를 위해 델컴퓨터가 신경을 쓰는 부분은 IT산업의 패턴을 분석하는 일. 경쟁을 통해 제품가격이 낮아지고 기술이 표준화되는 최적의 생산돌입 시점을 찾아내기 위해서다.
▽가장 고전적인 방법이 가장 성공적인 미래 전략〓마이크 조지 마케팅팀 부사장은 “새로운 제품을 앞서 만드는 것만이 IT기업의 앞으로 경쟁력을 좌우하는 것은 아니다”며 “가격 경쟁력을 바탕으로 상품의 질을 높이는 것이 가장 고전적이면서도 강력한 미래전략”이라고 강조했다.
그렇다고 업계의 흐름을 좇아가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델컴퓨터가 주목하고 있는 새로운 시장은 디지털 컨버전스 분야. 컴퓨터와 통신은 물론 원두커피 제조와 주차장 개폐(開閉)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스템이 통합되는 시대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특히 미국의 또 다른 PC제조업체 ‘게이트웨이’가 1900여명의 감원계획을 발표하는 등 IT경기의 장기 침체 가능성이 짙어지자 최근에는 3000여명의 연구인력을 디지털 컨버전스 분야로 집중시켰다.
HP와의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새로운 방향 설정의 필요성이 더 높아진 상황.
2001년에는 HP를 누르고 전 세계 1위 컴퓨터 생산업체에 올라섰지만 HP와 컴팩의 합병 이후 최근 다시 선두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PC 외에 기업용 스토리지와 워크스테이션, 네트워크 스위치 시장의 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다. 서버제품은 세계 시장점유율 2위 수준까지 올라갔다.
조지 부사장은 “소형 태블릿 PC 등 ‘주머니 컴퓨터’ 시대가 올 것으로 보고 관련 제품의 생산 및 개발 가능성도 따져보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올해 델컴퓨터가 목표로 하고 있는 매출액은 42조원대. 이 ‘성적표’를 달성할 경우 미국 IT경기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는 99년 이후 델컴퓨터의 실적은 오히려 2배로 늘어나게 되는 셈이다.
오스틴(미국)=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델회장 "쓸모없는 R&D에 돈 낭비 않겠다" ▼
“멋진 하루였어요? 우리 공장이 마음에 들던가요?”
미국 텍사스주 오스틴의 델컴퓨터 본사 사무실에서 만난 마이클 델 회장(38·사진)은 친구를 만나듯 편안한 웃음과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델 회장은 1984년 텍사스대를 중퇴하고 1000달러의 자금으로 델컴퓨터를 창업한 성공신화의 대표적인 인물. 사업계획에 대한 그의 한마디는 이제 미국의 한 해 정보기술(IT)산업 전망을 바꿔 놓을 정도로 영향력을 갖고 있다.
다음은 델 회장과의 일문일답.
―델컴퓨터의 미래전략은….
“사실 특별히 ‘전략’이라고 내세울만한 것은 없다. 고객의 입장에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살피는 델컴퓨터의 경영정신을 유지할 것이다. 제품의 질은 기본이지만 가격과 비용을 낮추는 데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5년 안에 매출액을 2배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쉽지 않을텐데….
“지금까지 남들이 어렵다고 한 시기에도 우리는 매년 두 자릿수 성장을 거듭해 왔다. 스토리지와 기업용 서버 등 사업영역을 확대하고 미주와 아시아, 유럽 각 지역의 시장점유율을 높여 나간다는 방침이다. IT경기가 살아나고 지금의 성장세만 유지한다면 무난히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경쟁업체에 비해 연구개발(R&D) 투자비율이 낮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미 매년 5억달러가량을 R&D에 투자하고 있다. 연구인력도 3000명에 이른다. 경쟁업체보다 투자금이 적다고 해서 연구개발을 소홀히 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컴덱스의 경우 개발은 해 놨는데 어디에 활용해야 할지조차 모르는 기술이 쌓여있다. ‘기술을 위한 기술’에 R&D 비용을 그토록 많이 투자하는 것은 낭비이다.”
―연구개발비를 제한하면 장기적 성장에 한계가 있는 것 아닌가.
“세상에는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는 R&D와 전혀 혜택을 주지 못하는 R&D 두 종류가 있다. 우리는 후자에 돈을 낭비하지 않을 뿐이다. 개발비용의 증가로 제품의 가격이 높아지면 결국 소비자의 부담이 커진다.”
―인력개발이나 관리는 어떤 식으로 하는가.
“항상 ‘왜(why)’라고 묻고 더 나은 것을 원하는 사람이면 인종, 나이, 성별에 관계없이 뽑는다. 데이터에 근거한 정확한 분석을 할 수 있는 두뇌를 찾는다. 서로가 지겨워할 때까지 인터뷰를 계속하는데 이 과정에서 능력이 자연스럽게 검증된다.”
델 회장은 비즈니스 위크가 선정하는 ‘올해의 기업인 25인’에 97년부터 3년 동안 연속으로 이름이 올랐고 2001년 타임지가 선정한 ‘25인의 가장 영향력있는 기업인’으로 뽑히기도 했다.
오스틴(미국)=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
▼한사람이 컴퓨터조립…작업 4시간만에 출고 ▼
미국 텍사스 오스틴 라운드록에 있는 델컴퓨터 공장에는 창고가 없다.
부품은 일정한 시간마다 부품업체에서 배달돼 오는 즉시 생산라인에 투입된다. 완성된 제품은 곧바로 공장 벽에 연결된 대형 컨테이너에 쌓인 뒤 소비자에게 직송된다. 2000여명이 이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컴퓨터는 하루 2만대 분량.
생산라인을 맡은 각 공장 직원들의 눈앞에는 1대씩의 컴퓨터 모니터가 움직이고 있다. 모니터 위에는 순서대로 각 소비자가 주문한 제품의 구체적인 내용이 뜬다. 캐나다 밴쿠버에 사는 크리스 브라소가 ‘○○인치 모니터, CD플레이어는 ○○사양, 옵션으로 ○○○’ 등을 주문했다는 리스트 명세다.
부품 라인에서는 이에 맞춰 필요한 재료들만 상자에 담은 뒤 각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생산라인에 이를 전달한다. 생산 담당자는 역시 모니터를 보면서 소비자가 주문한 모습 그대로 개별 컴퓨터를 조립해 낸다. 완성된 작업 부분은 모니터 위의 리스트 색깔이 빨간색에서 파란색으로 바뀌며 생산 과정을 자동으로 점검하고 있다.
각 제품이 한 사람의 담당 엔지니어의 손에서 완성되기 때문에 제품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에는 그를 역추적해 상담 등을 할 수 있다.
이어 제품의 포장(boxing). 해당 직원이 마우스와 마우스패드 등 주변 부품과 설명서 등을 상자에 넣을 때는 각 부품의 제품번호 바코드가 모두 즉석에서 스캐닝된다. 주문한 것과 다른 제품이 배달되는 등 문제가 생겼을 경우 번호를 역추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 이 작업을 위해 운반 컨베이어 벨트 위에는 조그만 스캐너들이 대롱대롱 달려 있다.
운반용 컨베이어 벨트가 봉합된 상자 위에 붙은 주소 라벨을 스캐닝해 자동으로 선박 컨테이너에 나눠놓으면 모든 작업이 끝난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대략 4시간. 제품을 최소 일주일 이상 창고에 쌓아둬야 하는 경쟁업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 경쟁이다. 이 시스템은 또 생산 원가를 10%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리 블래이록 인터넷서비스 담당 CEO는 “아주 간단한 사업모델이지만 이를 현재 규모와 복잡한 설비를 갖추고 실제 구현할 수 있는 컴퓨터회사는 없다”고 말했다. 많은 유사업체들이 델 컴퓨터의 생산모델을 시도했지만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정은기자 light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