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3월. 신건(辛建) 국가정보원장이 취임한 지 두 달쯤 뒤의 일이다.
여권 관계자 Y씨에게 “신 원장이 고향인 전주 사람들을 국정원으로 불러 식사 대접을 하는 등 개인적 일에 국정원을 동원하고 있다. 정치적 야심이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의 ‘제보’가 들어왔다.
제보자는 통칭 MK(목포 광주)로 불리는 전남 인맥 쪽 사람이었다. Y씨는 즉각 신건측에 사실 여부를 문의했다. 신건측은 “국정원장이 됐다고 고향 사람들이 찾아와 국정원 내 외빈 접대 공간인 국정관에서 식사 대접을 한 일은 있지만 정치적 야심 운운은 말도 안된다. 국정관은 원장뿐 아니라 국정원 직원 누구든지 손님을 만나는 장소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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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건측의 해명으로 이 문제는 ‘1회성 해프닝’으로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당시 신건은 국정원 내의 누군가가 자신을 음해하기 위해 그같은 얘기를 퍼뜨렸다고 판단해 발설자 색출을 지시했다는 후문이다. Y씨는 “나중에 국정원의 다른 직원으로부터 내 전화를 도청까지 했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말했다.
당시 그만큼 인사를 둘러싼 국정원 내부의 갈등이 심각했음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실제 DJ 정부 출범 이후 MK와 전북 출신은 국정원 내부를 장악한 양대 인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크게 ‘호남인맥’으로 분류됐던 이들 두 세력은 전북 전주 출신인 신건의 원장 취임을 계기로 서로 미묘한 갈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물론 DJ정부 출범 이후 국정원 핵심 요직은 주로 MK 인맥이 장악하고 있었다.
MK 인맥의 국정원 핵심부 진출은 이종찬(李鍾贊) 전 원장 시절부터 시작됐다. 98년 초 광주지부장이었던 C씨가 DJ정부 출범과 함께 국정원의 핵심 요직인 대공정책실장으로 발탁돼 중앙으로 올라오면서 광주지부 직원들을 대거 끌어올린 게 시발점이었다.
국정원 관계자 K씨는 “당시 광주지부에서 중앙으로 온 직원이 30∼40명에 이른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다 보니 광주지부의 근무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게 됐다. 궁여지책으로 국정원 내부 전산망에 ‘광주지부 근무 희망자 모집’ 공고를 냈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신건-나종일(羅鍾一) 차장-이강래(李康來) 기조실장 등 국정원 상층부는 대부분 전북 출신이 차지했다. 따라서 전남 출신의 요직 진출은 제한적으로 이뤄졌다. K씨는 “DJ정부 이전까지 국정원에서 전남 출신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로 희소한 존재였다. 높은 자리에 앉히려 해도 쓸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다”고 상황 변화를 설명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DJ정부 초기 국정원에서는 전남북의 구분이 별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호남 출신 전체의 인사 편중이 문제였다. DJ정부의 초대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김중권(金重權)은 “김 대통령도 초기 국정원의 차장 인선을 두고 ‘호남으로 다 쓰는 것은 좋은 인사가 아니다’고 말할 정도로 국정원의 호남 편중을 우려했다”고 소개했다.
DJ정부 권력 실세를 등에 업고 국정원 내 목포 광주(MK) 인맥의 주축을 형성했던 김은성 김형윤 정성홍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다가 2001년 말 비리혐의에 연루돼 차례로 검찰에 구속됐다. 당시 검찰 수사를 받기 위해 출두하는 김은성 김형윤 정성홍(왼쪽부터). -동아일보 자료사진
그러나 99년 5월 천용택(千容宅) 원장이 취임한 후부터 MK 출신의 고위직 및 요직 진출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했다. 김은성(金銀星·전남 장성) 대전지부장이 대공정책실장으로 발탁되고, 대기발령 중이던 정성홍(丁聖弘·전남 해남)이 경제과장으로 복귀하면서 MK 출신들이 요직에 포진했다. 특히 2000년 4월 총선 직후 투병을 위해 사직한 전북 출신 엄익준(嚴翼駿) 국내담당 차장 후임에 김은성이 기용되면서 MK 인맥은 국정원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신건이 원장에 취임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한 여권 관계자는 “신건은 취임 직후부터 ‘기강 확립’을 내세우며 내부 인사 쇄신을 시도했다. 쇄신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은 김은성 정성홍 및 김형윤(金亨允·전남 해남) 경제단장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들 모두가 전남 출신이었다. 이들이 신건에 대해 조직적인 저항을 시도하면서 국정원에서는 전남북 출신간에 이른바 남북전쟁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쇄신 대상으로 지목된 3인은 사실 신건의 부임 이전부터 각종 비리 연루로 내부에서 물의를 빚었다. 국정원 감찰실은 김은성과 정성홍이 ‘진승현(陳承鉉) 게이트’와 관련해 2000년 8월 진승현으로부터 ‘한스종금’ 인수를 둘러싼 금융감독원 조사를 무마해 달라는 청탁과 함께 돈을 받는 등 비리 혐의가 있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 상층부에 보고까지 했다. 김형윤의 경우는 ‘정현준(鄭炫埈) 게이트’와 관련해 2000년 7월 동방금고 이경자(李京子) 부회장으로부터 금감원 조사를 무마해달라는 조건으로 5000만원을 받은 것이 그해 12월 검찰 수사에서 드러나 국정원으로 통보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정치권 실세의 배경을 등에 업고 버티기를 계속했다. 국정원 사정에 정통한 정치권 관계자 P씨의 설명.
“김은성 김형윤 정성홍은 모두 김홍일(金弘一) 의원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런 배경에 힘입어 정성홍은 자신의 비리 의혹을 상부에 보고한 감찰실 관계자에게 ‘불법도청으로 고소하겠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당시 김은성도 정성홍을 싸고돌며 감찰실을 집중 견제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의 비리를 보고한 당시 감찰실장 L씨가 오히려 지방 지부장으로 좌천되는 파행상이 빚어지기도 했다.”
신건은 원장에 취임하기 전부터 이미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원장에 취임한 직후 우선 정성홍을 기조실 정보관리국으로 좌천 발령을 냈다. 김형윤은 2001년 7월 정보학교로 발령내는 선에서 타협했다. 국정원 관계자 K씨는 “좌천된 정성홍은 근무지는 아예 제쳐놓고 김은성 차장실로 출근하는 등 노골적인 반발을 계속했다. 그는 신건에 대해 ‘여권 실세 줄을 잡고 국정원장이 된 사람’이라는 등 닥치는 대로 비난을 퍼붓기도 했는데 신건이 고향사람 식사 대접하며 정치한다는 얘기도 그런 맥락에서 나왔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결국 신건도 어찌하지 못했던 김은성 김형윤 정성홍이 국정원에서 정리된 것은 각종 게이트가 표면화돼 검찰 수사를 받고 구속된 2001년 12월의 일이다.
한 전직 국정원 관계자의 설명. “이들 3인은 기본적으로 비리혐의자였다. 이 점에서 이들과 신건의 갈등을 ‘전남북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또 이들 MK 인맥이 단일전선으로 뭉친 것도 아니었다. 김형윤은 자신의 문제가 외부에 알려지게 된 것이 정성홍 때문이라고 생각해 정성홍을 미워했다. 정성홍도 경제과장 시절 부하들에게 상관인 김형윤의 지시를 받지 말라고 윽박지르는 등 이들 내부간의 갈등도 치열했다. 어쨌든 이들이 구속된 이후 2002년부터 국정원이 급속히 안정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MK 출신 실세들이 사라진 이후 국정원이 안정됐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이론이 적지 않다. 뒤이어 ‘전북 출신 편향’이라는 또다른 부작용이 빚어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현재 국정원장과 국내담당 이수일(李秀一) 차장이 전북 출신인 데다 해외담당 최명주(崔命柱) 차장은 신건의 고교(전주고) 동문이다. 대공정책실장, 정치단장 등 핵심 요직에도 전북 출신이 대거 포진해 있다.
이에 대해 국정원 관계자들은 “국정원에서 전북 출신은 과거부터 전남 출신에 비해 훨씬 수가 많았고 기획조정 예산 조직 등 핵심 자리를 거친 사람도 상당수였다. 저변이 넓다 보니 자연스럽게 중용되는 경우가 있는 것 아니냐”고 설명하고 있다.
‘전북 편향’만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호남 편중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실제 국정원내의 관리관(1급) 이상 고위직 가운데 현재 절반가량이 바로 호남 출신이다.
뿐만 아니라 줄 좋은 사람을 규정을 무시하며 승진시키는 등 국정원의 인사 난맥상은 쉽게 교정되지 않고 있다. 해외담당 차장 산하의 P국장의 경우 이사관(2급)으로 승진한 지 9개월 만인 2001년 4월 인사 규정(최단 직급 승진 연한은 3년)을 무시하고 1급 보직인 국장 자리를 맡아 국정원 내에서 잡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P국장은 DJ정부 최대 실세였던 박지원(朴智元)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고교(전남 문태고) 후배여서 국정원내에서는 ‘박지원 인사’라는 소문이 파다하다.
▼‘앙숙’ 김은성-권노갑 ▼
DJ 정권에서 화려하게 부상했다가 몰락한 김은성(金銀星) 전 국가정보원 차장은 98년 초 김대중 정부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정권 실세들과 인연을 맺었다.
그러나 김은성은 유독 권노갑(權魯甲) 전 민주당 고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권노갑측은 “권 고문은 김은성이 14대 국회에서 정보위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부터 ‘정치적’이라는 이유로 별로 좋게 보지 않았다. 2000년 8월쯤 김은성이 DJ의 3남 김홍걸(金弘傑)씨가 최규선(崔圭善)과 가깝게 지내며 각종 이권에 개입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청와대에 올리자 DJ는 권 고문에게 사정을 알아보도록 했다. 권 고문은 김홍걸을 만나서는 ‘최규선과 만나지 말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했으나 국정원 정보를 불신했던 탓에 정작 김은성을 불러서는 ‘일이나 똑바로 하라’고 질책했다.”
이후 김은성은 권력 요로에 다니며 권노갑의 문제를 집중 제기했다는 후문이다. 한 정치권 관계자는 “분당 파크빌 특혜 분양 문제가 불거진 것도 김은성측이 이 사건에 권노갑이 관련돼 있다는 첩보를 입수, 컴퓨터 해킹을 통해 분양자 명단을 빼낸 것이 발단이라는 게 정설이다”고 말했다.
결국 2001년 말 ‘진승현(陳承鉉) 게이트’로 구속된 김은성은 검찰 수사 과정에서 권노갑에게 5000만원을 건넸다는 일방적 진술을 했고, 권노갑은 이를 부인했으나 2002년 5월 구속돼 현재 2심 재판이 진행 중이다.
김은성은 2000년 10월 금융감독원이 동방금고 불법 대출 사건 즉, ‘정현준(鄭炫埈) 게이트’에 대한 조사를 시작하자 금감원 사정을 잘 아는 국정원 요원 S씨를 금감원측에 보내 무마를 시도하기도 했다. 전직 국정원 관계자는 “당시 금감원 국장이던 장래찬(張來燦)의 자살도 국정원과 관련 있다는 설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김은성의 권력 유착은 2002년 10월 특별가석방 되는 과정에서 다시 한번 논란이 됐다. 김은성은 당초 가석방 대상 명단에 없었으나 누군가가 막판에 한글로 김은성을 적어 넣었고, 당시 김각영(金珏泳) 대검차장은 이를 모른 채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김은성이 ‘권력실세’와 모종의 막후거래를 했던 것 아니냐는 의문이 여전히 제기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