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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김재완/태극원리 닮은 ‘量子 컴퓨터’

입력 | 2003-03-21 18:29:00


최근 좀 더 빠른 계산을 위해 병렬 컴퓨터 방식이 많이 쓰이고 있다. 요즘 유행하는 클러스터 컴퓨터에서 보듯이 하나의 계산을 수백 수천 대의 컴퓨터 네트워크에 나눠서 하므로 마치 수많은 사람이 공동작업을 하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러나 100대의 컴퓨터를 병렬로 연결하면 기껏해야 100배 정도 빨라지고 컴퓨터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많을 경우 이 정도의 효율에도 미치지 못한다.

최근 물리학자들은 연산장치를 100배로 늘렸을 때 계산능력이 100배가 아니라 문제에 따라 최고 2의 100제곱배(약 10의 30제곱, 1 다음에 0이 30개 있는, 경(京)의 100조배) 정도까지 지수적으로 증가하는 ‘양자(量子) 컴퓨터’를 제안했다. 디지털 컴퓨터가 정보의 단위로 0 또는 1의 비트(Bit)를 쓰는 데에 비해 양자컴퓨터는 0과 1이 양자물리학적으로 중첩된 상태인 양자비트 또는 큐빗(Qubit)을 사용한다.

▼‘음양조화’-‘큐비트’ 서로 비슷 ▼

큐빗 수가 늘어날수록 양자컴퓨터의 능력은 지수적으로 증가한다. 윷놀이를 생각하면 이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윷 네 가락을 던지면 도 4가지, 게 6가지, 걸 4가지, 윷 1가지, 모 1가지 등 모두 16가지(2의 4제곱) 경우가 생긴다. 디지털컴퓨터는 이 16가지 경우를 한 번에 하나씩 계산하는데 양자컴퓨터에서는 이 모두를 한꺼번에 계산할 수 있다.

현재 최고의 양자컴퓨터는 핵 자기공명 방식으로, 일곱 큐빗으로 ‘15=3×5’라는 소인수분해를 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수백 내지 수천 큐빗의 양자컴퓨터가 만들어지면 디지털컴퓨터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계산이 순식간에 가능해진다.

나노기술 시대를 예견한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리처드 파인먼 교수는 나노 양자 시스템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위해 양자컴퓨터를 제안했다. 나노기술에 중요한 양자 다체(多體) 문제 중에 디지털컴퓨터로 불가능한 것도 양자컴퓨터로는 해결할 수 있어 양자컴퓨터는 나노기술 시대를 이끌어 가는 데에 필수 도구가 될 것이다.

컴퓨터 회사 IBM은 유전자 검색에 쓰기 위해 현존 최고 성능의 컴퓨터보다 1000배 빠른 컴퓨터를 개발하는 ‘블루진(Blue Gene)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데 양자컴퓨터는 그것보다 1000배 이상 빨리 유전자를 검색할 수 있어 유전자 의학과 바이오 기술 발전을 가속화할 수 있다.

무엇보다 양자컴퓨터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분야는 디지털 통신보안 쪽이다.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공개키 암호가 디지털컴퓨터 앞에서는 난공불락으로 알려져 있지만 양자컴퓨터로는 손쉽게 해독될 수 있음이 1994년 미국 벨연구소의 쇼어 박사에 의해 밝혀졌다. 양자컴퓨터가 현재의 디지털 통신보안을 위협하는 한편 양자암호기술은 도청이 절대로 불가능한 통신보안을 제공해 양자물리학과 디지털 통신보안은 ‘병 주고 약 주는’ 관계에 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을 비롯한 전 세계의 정보기관과 통신보안 관련 기업들은 양자컴퓨터와 양자암호기술의 개발 추이에 바짝 긴장하고 있다.

양자암호기술의 발달은 양자컴퓨터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있어 머잖아 실용화될 것으로 보인다. 스위스는 제네바와 로잔 사이에 길이 67㎞의 광섬유 양자 암호통신에 성공해 웬만한 도시 내부 또는 인접도시 사이의 양자 암호통신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상업화를 눈앞에 두고 있다. 미국에서는 위성통신에까지 양자 암호기술을 적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양자물리학자들은 양자 텔레포테이션이라는 거의 순간이동에 가까운 공간이동방식을 고안해내 실험에 성공했는데 이는 양자암호의 전송거리를 무한정 연장하는 양자중계기에 사용될 수 있다.

▼‘IT 한국’에 새로운 기회 ▼

양자컴퓨터는 양자물리학적인 효과가 두드러진 양자광학이나 나노기술을 바탕으로 만들어지기에 ‘나노기술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핵 자기공명 외에 이온덫, 양자광학, 초전도체, 양자점 등 여러 가지 양자컴퓨터 구현 방식이 제안되고 있지만 아직 초기단계의 연구에 머물고 있다. 본격적인 양자컴퓨터와 양자암호기술이 실현되면 나노기술과 바이오기술의 발달이 가속화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도청이나 해킹을 염려할 필요 없는 보안환경에서 전자상거래를 비롯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지고 국가나 기업의 안보가 튼튼해질 것이다.

우리 전통놀이 윷이나 태극기 4괘의 음과 양이 디지털 비트의 0 또는 1과 비슷하고, 음과 양이 역동적 조화를 보이는 태극이 0과 1의 양자물리학적 중첩상태인 큐빗과 닮은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닌 것 같다. 비교적 미개척 분야인 양자컴퓨터와 양자통신 연구는 우리나라에 새로운 기회를 가져다 줄 것으로 전망된다.

김재완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