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파리에서 생활하다가 돌아와 국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프랑스는 가히 예술가들의 천국이라 할 만한 나라다. 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격려하는 정책 시스템이 어느 나라보다 안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프랑스에 사는 예술가들에게도 어려운 시절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아는 조르주 루오, 툴루즈 로트레크, 파블로 피카소 등이 몽마르트르에서 살던 시절에도 끼니조차 때우기 힘들었던 작가들이 많았다. 루오나 로트레크 같은 화가들 역시 그러했다. 잠시 그 시절의 몽마르트르를 상상해 보자.
▼아직도 배고픈 예술가들 ▼
전철역 불랑쉬에서 천천히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걸어 올라가면 풍차가 나온다. 뤼픽 골목길에 작은 호텔이 보이고, 조금 더 올라가면 성당 쪽으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이 길을 오가며 루오는 절친했던 동료 로트레크나 연인을 만나기 위해 물랭루주를 들락거렸을 것이다. 정육점을 지나치며 심한 허기를 느꼈을 테지만, 주머니는 텅 비어 있다. 왁자지껄한 카페를 지나 물랭루주 안으로 성큼 들어서면, 먼저 와 있던 로트레크가 루오를 반긴다.
루오보다 일곱살 위인 로트레크는 새 화실을 마련했지만 매일 술타령만 하고 있다. 로트레크는 오늘도 볼이 툭 불거져 나오고 나이가 제법 들어 보이는 무희에게 수작을 걸고 있다. 로트레크가 결국 술병(病)으로 세상을 뜬 뒤 루오는 밤마다 화실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밤새 숙취에 시달렸을 그녀의 초췌한 얼굴을 보니 측은지심이 절로 인다. 그녀를 모델로 해 그린 그림이 바로 ‘창부(娼婦)’라는 작품이다. 그 뒤 루오는 침울하고 어둡지만 사람들에게 종교적인 신뢰감을 주는 성상(聖像)을 많이 그렸다. 가난했지만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우고 간 루오와 로트레크.
두 사람에 비하면 피카소는 일찍부터 성공한 화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피카소의 기막힌 조작이 개입돼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별로 없다. 피카소가 위대한 화가였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피카소는 뛰어난 사기꾼이자 연기자이기도 했다. 그림이 잘 팔리지 않던 시절 피카소는 화랑을 돌며 묻고 다녔다. “여기 피카소 그림 없나요?” 화랑 주인이라면 당연히 피카소라는 화가가 누군지 궁금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화랑에 자기 그림이 전시되면 피카소는 다시 가족이나 친구들을 시켜 그 그림을 사들이게 했다. 그런 과정이 몇 번 반복되면서 그림이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피카소는 곧 유명작가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렇듯 어느 시대건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작가가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공존하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화가들 대부분은 열악한 상황에서 근근이 버티며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프랑스에선 정부가 화가들에게 작업실을 지원해준다. 하지만 변변한 작업실 하나 없는 우리 화가들은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그림을 그려야 한다. 힘들게 그림을 그려도 좀처럼 팔리지 않는다. 가족이나 친구들이 격려조로 한두 점 사주는 것에 만족해야 할 지경이다. 우리나라에서 그림을 사는 이들은 주로 컬렉터들이다. 아직 국민 사이에 그림을 보고 즐기는 문화적 마인드가 형성되지 못한 탓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컬렉터들은 환금될 수 있는 그림에 맛이 들어 생존 작가의 그림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그림을 일종의 투기수단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주범이다.
▼그림은 투기수단 아닌데…▼
지금은 예술 위기론이 공공연하게 나도는 시대다. 그럼에도 꿋꿋이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지켜나가는 작가들도 많다. 몽마르트르의 ‘루오’는 오늘에도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술가로서의 자의식으로 무장한 우리 시대의 ‘루오’들, 그들로 인해 우리는 계속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경력 ▼
△1957년생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대상 수상(1982) △프랑스 파리국립미술학교 졸업(1987) △파리 블라키아화랑에서 개인전 ‘에네르지’(1992) 개최 △현재 인터넷(http://cafe.daum.net/nuit)에서 동호회를 만들어 ‘알기 쉬운 미술운동’ 전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