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생명공학계에서 제기되는 이종간 핵이식 기술 이용의 필요성에 대한 역설은 다른 나라 과학자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현상이다.
혹자는 배아연구에 대한 규제가 ‘연구의 자유’와 ‘난치병 환자의 치료받을 권리’를 침해한다고 주장하지만, 연구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어떤 형태의 연구든 허용되는 것은 아니며, 치료받을 권리 또한 무제한적인 것이 아니다. 연구의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며, 연구자의 개인적 야심이나 호기심을 채우기 위한 무모한 모험에 국민의 앞날을 내맡길 수는 없다.
실험에 이용되는 배아들은 미래의 몇몇 사람들에게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를 불확실한 연구를 위해 희생되므로, 치료용 복제는 속임수라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배아의 지위를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배아실험 여부는 결정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생명의 출발시점에 이미 유전적 개체성이 결정되며, 인간 삶의 모험이 시작되기 때문에 배아의 복제 및 실험을 반대한다. 배아가 수정 순간부터 인간이 아니라면, 결코 인간이 되지 않을 것이다. 수태의 결과가 인간인지 아닌지 의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을 감행하는 것은 중죄이다. 잡목 속에 움직이는 것이 동물인지 사람인지 확실하지 않을 때 사냥꾼은 총을 쏘지 말아야 함과 같은 이치다.
배아가 인격체라면 생명권을 갖는다. 인격체가 아니라면 한 발 물러나 그것이 인격체에 이르는 통로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과거 배아로 존재하지 않고서 지금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배아는 단지 잠재적 인간일 뿐이므로 실제 인간과 동일한 대우를 받을 수 없다고 인정한다 해도, 다른 존재와 달리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함을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한다면, 배아도 그에 준하는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한다. 임의적 실험이나 수단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양한 입장들을 종합해 볼 때, 이종교잡을 포함한 치료용 배아복제를 허용해 자유로운 연구를 보장하는 생명법을 시급히 마련하라는 촉구는 타당성이 없다. 연구 성과가 좋아 선진국 대열에 끼는 것도, 난치병 치료에 획기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것도 모두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예를 볼 수 없는 해괴망측한 연구를 생각해낸 배경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비록 반인반수(半人半獸)를 만들려는 목적이 아닐지라도, 인간과 동물의 교잡을 통해 형성된 줄기세포를 질병치료를 위해 이용하겠다는 발상은 인간을 실험대상으로 삼겠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제까지 제시된 ‘생명윤리 및 안전에 관한 법률안’은 배아복제와 이종교잡을 금지하고 있지만, 자문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대통령이 허용하는 경우에는 예외를 둔다고 해 금지조항을 유명무실화하고 있다. 애초부터 대통령과 자문위원들이 권한을 남용할 소지를 만드는 것은 옳지 않다.
생명윤리와 안전을 확보하고 생명과학기술 발전을 균형 있게 발전시켜 나가려면 제도적 보완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각계의 입장과 연구동향 및 정보를 정확히 수집하고 선진국들의 경험을 거울삼아 합리적인 법규를 마련해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어야 할 것이다.
▼알림 ▼
이 글은 3월8일자 본보 ‘과학세상’에 ‘치료용 배아복제는 허용해야’란 제목으로 실린 칼럼에 대한 반론입니다.
구인회 가톨릭대 생명윤리硏 연구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