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9·11테러가 옛 소련 붕괴 이후 느긋한 잠에 빠져 있던 미국을 깨우는 ‘모닝 콜’이었다면, 2003년 3월의 이라크 공격은 미국의 ‘도덕적 헤게모니(Hegemony·지배력)’를 심각하게 손상시키는 신호탄이 될 수 있다. 승리가 뻔한 전쟁이 끝나면 미국의 ‘군사적 경제적 헤게모니’는 한층 강화될 것이다. 그러나 세계를 시끄럽게 하고 있는 ‘반전(反戰) 열풍’이 두고 두고 그들의 리더십에 걸림돌이 된다면 미국은 길게 보아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을지도 모른다.
▼헤게모니와 ‘비창조적 흥분’▼
이탈리아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대중의 자발적 동의와 강제력이 조화를 이룰 때만이 한 사회를 이끌어가는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있다”고 했다. 이를 넓혀 말하면 세계 유일 강국인 미국의 경우 세계인의 자발적 동의 하에 군사력을 사용해야만 그들의 헤게모니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하지만 미국은 유엔의 동의조차 구하지 않았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시작된 3월 20일을 ‘슬픈 날’이라고 말했다.
물론 대량살상무기를 숨겨 놓고 테러를 지원한 혐의를 받는 독재자 사담 후세인을 두둔하자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목적이 정당하다고 수단과 절차의 불법성마저 옹호될 수는 없는 일이다. 후세인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일방주의적인 선(善)은 무고한 이라크 국민에게는 죽음을 강요하는 악(惡)일 뿐이다.
노무현(盧武鉉) 정부의 딜레마는 뚜렷하다. 노 대통령은 국익을 고려해 미국을 지지하고 파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다시 세상이 시끄럽다. ‘반전 촛불시위’가 이어지고 ‘노무현의 사람들’은 곤혹스럽다. 지지세력이 등을 돌리는 기색이 역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말한 ‘거리감’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베버는 정치인에게 요구되는 세 가지 자질, 즉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 중에서 균형감각이 가장 중요하며그것을 위해서는 사람과 사물에 대해 일정한 거리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열정은 곧 ‘비창조적 흥분상태’로 변하기 쉽고 결국 ‘허영심에 가득 찬 자기 도취’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새 정부가 출범하고 한 달이 지나는 동안 ‘노무현의 사람들’ 중 몇몇이 혹시 ‘비창조적 흥분상태’와 ‘허영심의 자기 도취’에 빠진 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문희상(文喜相) 대통령비서실장은 지난주 “새 정권이 예상보다 빨리 정착되고 있다”면서 이는 “노 대통령의 리더십, 중요한 통치술의 하나는 긴장이고, 다 긴장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언론 정치 검찰 모든 것과 긴장관계로 돌아서고 있는데 그것은 정상화 과정이며 저항이 있어도 가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란 무릇 사회구성원간 이해와 갈등을 조정해 긴장을 푸는 것이 아니던가.
정권 초기에 개혁 드라이브를 걸어야 한다는 필요성마저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긴장의 통치술’은 아무리 정상적 긴장관계라 하더라도 자칫 불필요한 적대감을 부를 수 있으며 새로운 질서의 정착은커녕 오히려 집권세력의 고립화를 재촉할 수 있다. 대통령의 ‘오보와의 전쟁’에서부터 문화관광부 장관의 “특종을 하려면 쓰레기통을 뒤져라”는 식의 ‘취재지침’, 대통령인사보좌관의 “집에 가서 부인과 놀러다녀라”는 식의 ‘1급 공무원 물갈이’ 발언이 동일한 코드의 긴장이라면 실로 우려되는 권력 현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소모적 전쟁 종식시켜야▼
새로운 권력이 나름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람시의 말대로 대중의 자발적 동의를 구하고 확대해 나가지 못하면 헤게모니를 유지할 수 없다. 그러려면 베버의 말처럼 균형감각으로 ‘비창조적 흥분상태’와 ‘허영심의 자기 도취’를 경계해야 한다. 비주류의 정책결정라인 진입은 변화와 진보의 측면에서 볼 때 긍정적이다. 하지만 그들이 자꾸 편을 갈라 세상에 불화와 불유쾌함의 기류를 넓게 한다면 그러한 개혁은 기존 주류의 두터운 저항을 부르기 십상이다.
명분 약한 미국의 이라크 공격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우리 속의 ‘전쟁’이 아니겠는가. 노 정권은 이 소모적 전쟁을 시급히 종결시켜야 한다.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