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소리에 맞춰 김매기를 하는 농부들. 상호 부조의 성격을 가진 공동 노동인 두레는 북이나 꽹과리로 보조를 맞추며 흥겹게 일하는 한국 고유의 전통이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한국 문화에는 ‘두레’라고 하는 공동부조(共同扶助)의 작업 공동체가 존속해 왔다. 고대에는 모든 작업에 두레를 적용했는데 조선왕조 후기부터는 주로 논농사의 보치기, 모심기, 김매기 등을 두레로 실행했다. 조선왕조 말기의 논농사 두레를 예로 들면, 한 마을의 16세 이상 55세까지 성인 남자는 한 가족에게 1인이 있거나, 2∼5인이 있거나 차별없이 모두 의무적으로 두레에 가입했다. 그들은 모내기철이 시작되기 전 모두 마을 농청에 모여 ‘호미모둠’이라는 발대의식을 열고 두레 역원 선출과 공동작업 순서를 결정한 다음 간단한 축제를 벌였다.》
두레의 작업 농경지는 그 마을 공유지와 사유경작지 ‘전체’ 농지를 모두 자기마을 1개 경작지로 간주하여 공동 노동으로 작업해줬다. 마을의 과부와 병약자 가족 등 두레꾼을 내지 못한 노동력 결핍가족의 농경지에 대해서도 물론 전혀 차별없이 공동노동을 제공해서 모내기 김매기 등을 완결해줬다. 따라서 과부, 병약자 등 불우한 처지의 마을 성원들이 두레로부터 가장 큰 혜택을 받았다. 두레는 가장 불행한 처지의 마을 성원들에게 매우 따뜻하고 실질적인 ‘공동부조’의 일을 해주는 제도였다.
또한 두레는 두레꾼을 낸 성원들의 농경지에서는 ‘상호부조’의 성격을 가진 제도였다. 이 경우 한 농민 가족이 몇 명의 두레꾼을 내었는지 계산하지 않고, 차별없이 상호부조의 공동노동을 해주었다. 오직 지주의 경작지에 대해서만 정확한 보수를 계산해 받았으나 이 수입은 두레꾼에게 분배하지 않고 농악기 등의 공동비용으로 사용했다.
두레의 공동노동은 ‘실기(失期)’를 해서는 안 되는 논농사에서 과부 병약자 등 노동력 결핍 가족의 경작지도 ‘실기’하지 않고 효율적 농업경작을 하게 보장해 줬다. 이것은 과부 병약자 등 노동력 결핍 마을 성원들을 ‘공동부조’할 뿐 아니라 마을 전체의 농업 총생산량도 증가시켰다.
두레꾼들이 이른 새벽 농악 신호에 따라 농청에 집합해서 대오를 지어 작업장에 나갈 때는 두레의 상징으로서 맨 앞에 ‘농기’가 나가고 이어서 영기가 따랐으며, 그 뒤에 상쇠의 선도로 ‘길군악’이라는 강렬하고 장쾌한 가락의 행진곡을 치면서 두레꾼이 뒤따랐다. 그 가락이 우렁차고 전투적이어서 두레꾼들은 마치 승리가 담보된 전투에 나가는 전사들처럼 흥에 겨워 보무당당하게 농악에 발맞춰 어깨를 흔들면서 씩씩하게 작업장으로 행진했다. 작업장에 도착하면 농기와 영기를 논두렁이나 근처 공지에 높이 세워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에도 보통 북이나 꽹과리잡이 하나를 선발하여 논두렁과 두레꾼들의 뒤에 서게 했다. 두레꾼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공동노동을 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처지면 쇠잡이가 처진 두레꾼의 꽁무니에 다가가서 힘차게 꽹과리를 쳐댔다. 동시에 처진 두레꾼은 자기가 처진 것을 깨닫고 더욱 빠르게 동료 두레꾼들과 보조를 맞췄다. 두레꾼들은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도 공동식사를 하며 공동오락으로 장쾌한 가락의 농악을 쳤다. 두레의 하루 공동노동이 끝나고 농청으로 돌아올 때는 새벽 출역할 때와 마찬가지의 순서로 농기를 앞세우고 즐겁게 농악을 울리면서 피로도 잊은 채 씩씩하게 돌아왔다. 두레의 공동노동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 개별노동의 합계보다 노동 생산 능률이 높았다. 세 벌 김매기를 모두 끝낸 뒤에는 ‘호미씻이’라는 성대한 축제를 열었다.
한국민족은 이 ‘두레’제도를 발명하여 농업생산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고통스러운 농업노동’을 ‘즐거운 노동’으로 전환시키는 문화를 창조 발전시켰다. 여성들도 ‘길쌈두레’를 발전시켜 즐거운 방직노동을 했다.
두레에 대한 기록은 삼한·삼국시대에 대한 고문헌에도 나온다. 신라에서는 길쌈두레가 성행하여 한가윗날에는 경연대회도 열었다. ‘삼국지 위서(魏書)’는 삼한의 풍속으로 “그들은 서로 부르기를 모두 徒(도)라고 한다(相呼皆爲徒)”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병도 교수는 이 ‘徒’를 ‘두레’의 음과 뜻을 합친 번역이라고 정곡을 찔러 해석했다. 이병도 교수는 또 ‘가락국기’에 나타나는 가라 9干(간) 중에 ‘아도간(我刀干)·여도간(汝刀干)·피도간(彼刀干)·오도간(五刀干)’의 刀(도)도 두레의 음역이라고 해석했으며, 탐라국(제주도)의 高(고)을나(乙那), 良(양)을나, 부(夫)을나가 거주지를 정한 一徒(일도)·二徒·三徒가 ‘두레’의 차음(借音)이라고 설명했다. 참으로 탁월한 해석이라고 본다. ‘아도간’은 ‘우리 두레의 대장’의 뜻이고, 일도(一徒)는 ‘제1두레’의 뜻이다. 이동할 때 두레(共同隊)를 편성하여 이동 정착한 것이다.
세종이 1434년경 김종서 장군을 지금 함경도에 파견하여 6진(鎭)을 개척한 후 사민(徙民)정책을 실시해 남부지방으로부터 함경도 지방에 백성을 옮길 때에도 ‘두레’를 편성하여 사민시켰다는 흔적이 남아있다. 조선왕조시대에는 ‘두레’를 ‘社(사)’로 표시도 했는데, 다른 도에서는 면(面)으로 부르는 행정단위를 함경도에서만 ‘社’로 호칭하는 것은 ‘두레’를 편성하여 사민해서 두레별로 정착시킨 것을 나타내는 흔적인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18세기말에 여전제(閭田制) 토지개혁을 구상한 것도 당시 ‘두레’의 공동노동의 실재에 기초를 둔 것이다.
운양 김윤식(雲養 金允植)은 1891년에 충청도 면양(沔陽)에 귀양갔다가 농민들이 ‘두레’와 ‘농악’으로 즐겁게 농사짓는 것을 보고 아름다운 풍속에 감탄했다. 백범 김구(白凡 金九) 선생도 ‘백범일지’에서 1898년에 전라도 김제 만경에서 모내기를 모두 ‘두레’로 매우 즐겁게 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경탄해서 기록했다.
한국문화에는 과부 병약자 등 불우한 이웃을 공동부조, 상호부조로 도우면서도 농업생산성을 높이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즐거운 노동으로 전화시키는 지혜로운 ‘두레’라는 제도와 풍습이 있었다. 이 ‘두레’는 일반 문화와 가치에도 확산되고 침전되어 한국인들은 동포들이 자연재해나 불운에 부닥칠 때에 온 사회성원이 공동부조와 상호부조로 돕는 아름다운 문화전통을 생활 각 부분에서 성립, 발전시켜 왔다.
신용하 한양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