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바람이 무서운가.
나이 50이 넘어 영화 ‘지구를 지켜라’로 스크린에 첫 데뷔한 백윤식(56)은 이 영화 속에서 철저히 망가진다(영화 ‘불후의 명작’에서 카메오 출연을 한 경험은 있다).
그가 맡은 강만식 사장은 시종일관 삭발을 한 채 팬티 바람으로 엽기적인 고문을 당한다. 오죽하면 이 영화를 제작한 싸이더스의 차승재 대표가 그를 만나 처음한 말이 “선생님, 좀 망가지셔야겠습니다”였을까.
영화 ‘지구를 지켜라’에서 30년 연기생활의 관록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준 백윤식씨. 원대연기자
“시나리오만 보내라고 했는데, 꼭 만나서 줘야겠다는 거에요. 차 대표, 김선아 프로듀서, 장준환 감독이 왔더라고. 제목이 ‘지구를 지켜라’래. 만화도 아니고 뭔가 싶었어요. 집에 와서 시나리오를 읽는데 장난이 아닌거라. 머리 깎는다는 얘기는 하지도 않았는데 읽어보니 삭발도 해야 하고 의상도 달랑 팬티 한 장인거야.”
하루는 ‘해야겠다’, 하루는 ‘못하겠다’를 오갔다. 그런데 시나리오를 읽어볼수록 강 사장이라는 캐릭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납치된 상황에서 인간이 겪는 오감(五感)을 모두 표현할 수 있는 배역이었기 때문이다.
“머리를 빡빡 깎고 나타나니까 주변에서 ‘절에 가냐’고 묻더군요. 영화 찍는 중이라고 하니까 ‘스님 역을 맡았냐’고 하대요. 그것도 아니라고 하니까 무슨 영화냐고 자꾸 묻는거에요. 그런데 이 영화 내용이 좀 복잡해야지. 일일이 설명할 수도 없고.”
그는 이번 영화에서 1억 2000만원의 출연료를 받았다. 영화 속에 양념처럼 등장하는 중견연기자가 받는 출연료는 2000∼3000만원선. 이번 영화에서 그는 신하균과 공동 주연을 맡은데다 6개월간 삭발 머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이 고려돼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할리우드에서는 아널드 슈워제네거가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터미네이터 3’에 출연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나이 먹으면 맡을 수 있는 역이 아버지뿐이에요. 관록이 묻어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없죠. 이 배역을 맡은 것도 50대 연기자가 무언가 보여줄 수 있다는 게 기뻤기 때문이에요.”
사실 그의 외모는 코미디와 거리가 멀어보인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남성복 모델로 어울릴 법한 중후한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드라마 ‘서울의 달’(1994) ‘파랑새는 있다’(1997)에서 그가 보여준 무표정 코믹연기를 기억한다면 그의 변신이 생소하지는 않다.
“아내와 아들이 시사회에서 영화를 보고 말이 없더라고요. 말은 안하지만 속으로는 ‘그 나이에 참 처절하다’는 생각을 왜 안했겠어요.(웃음)”
그는 연기생활 30년만에 요즘처럼 인터뷰 요청이 쇄도한 적이 없다고 했다. 낮에는 여러 인터뷰에 응하고 밤에는 시사회를 찾아다니며 관객과 만난다. 그는 “영화의 성공으로 ‘빡빡 머리’가 유행해 안드로메다인(삭발 헤어스타일을 한 사람)을 길거리에서 자주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농담을 건넸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