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패션 비주얼머천다이징팀 소속인 패션 디스플레이어 이영미 실장(왼쪽)과 패션 인테리어 디자이너 김주현 대리. 전국 600여 의류매장의 분위기를 창조해 내는 주인공들이다. 박중현기자
파리의 샹젤리제 거리나 로마 스페인광장 앞의 부티크에 들어서면 한국의 여느 옷가게와는 느낌부터 다르다. 동대문의 재능 있는 디자이너도 세계적인 스타일의 옷을 만들 수 있지만 이런 부티크에서 풍기는 화려한 느낌, 가게를 찾은 이들을 ‘특별한 사람’으로 보이게 해 주는 분위기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마네킹에 어느 옷을 입혀 어떤 자세로 세울 것인지, 가게에 들어선 고객의 발걸음을 어느 쪽으로 이끌 것인지 꼼꼼히 계획해 이런 화려한 분위기를 창조하는 패션업계의 전문가들이 있다. 패션 디스플레이어와 패션 인테리어 디자이너는 패션업계의 꽃인 의상 디자이너보다 덜 화려할지 몰라도 패션산업이 발전할수록 더욱 각광받는 직종이다.
▽패션 매장의 분위기 메이커 ‘패션 디스플레이어’=LG패션 비주얼 머천다이징팀의 이영미(李英美·36) 디스플레이 실장은 경력 13년의 베테랑 디스플레이어다.
충남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이 실장은 졸업 후 1년간 대형 패션업체에서 운영하는 디스플레이 전문과정을 거쳐 이 분야에 뛰어들었다. 그 후 크레송, 나산, 삼성물산 등의 패션업체에서 디스플레이어로 활동하다 2000년 11월부터 LG패션에서 일하고 있다.
“LG패션이 운영하는 전국 600여개 패션매장의 디스플레이를 직원 2명과 함께 계획해요. 연령대, 가격 등 브랜드의 ‘컨셉트’에 맞춰 매장 분위기를 어떤 방향으로 꾸밀 것인지 결정하고 새로 선보인 옷 중에서 어떤 옷을 어떤 표정의 마네킹에 입힐지, 어떤 소품으로 어떤 분위기를 만들 것인지 결정해 매달 매뉴얼을 만들고 매장 관계자들을 교육합니다.”
이 실장이 속해 있는 팀은 패션 선진국에서 강조되는 ‘비주얼머천다이징(VMD)’을 LG패션 안에서 총괄하고 있다. 비주얼머천다이징은 ‘상품계획의 시각화’를 뜻하는 개념으로 디스플레이와 인테리어, 매장 내 그래픽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매장의 총체적 분위기를 빚어내는 작업을 일컫는 말이다.
이 실장과 함께 2명의 직원이 맡고 있는 브랜드만 신사복과 여성복, 골프웨어 등 13개. “새로운 방향으로 가게 분위기를 바꾸려고 할 때 변화를 꺼리는 매장의 숍마스터들과 입씨름하는 경우가 많아요. 일주일에 2, 3번씩 직접 매장을 찾아 분위기를 점검하고 지역의 상권까지 고려해 디스플레이에 변화를 줘야 해요.”
매장의 3분의 2 정도가 백화점에 입점해 있어 백화점을 찾는 일이 많다. 백화점에 나가는 날이면 다른 브랜드의 매장까지 꼼꼼히 둘러보고 참신한 소품을 찾기 위해 식기매장부터 가구매장, 꽃가게까지 뒤지고 다닌다.
“한 패션브랜드가 성공하기 위해 상품 자체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쯤 될 거예요. 디스플레이와 인테리어 등으로 얼마나 그 브랜드에 어울리는 매장 분위기를 연출하느냐가 나머지 50%를 결정하죠.” 마네킹을 친구 삼아 일에 빠져 사느라 결혼도 못했다는 이 실장의 자신감 넘치는 설명이다.
▽간판부터 가구까지 ‘패션 인테리어 디자이너’=역시 LG패션에서 패션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활동중인 김주현(金周炫·32) 대리는 1998년에 서울시립대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곧장 입사했다.
“집이나 빌딩의 인테리어 작업을 할 때는 주인의 감성에만 맞추면 됩니다. 하지만 패션매장의 인테리어는 제품 브랜드의 컨셉트와 구매고객의 성향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훨씬 까다롭죠. 젊은 층을 상대로 하는 중저가 브랜드라면 심플하고 경제적인 느낌, 나이든 고객이 많은 브랜드라면 편안한 느낌 등 표현의 폭이 훨씬 넓어요.”
봄철로 접어드는 요즘이 김 대리에게는 1년중 가장 바쁜 시기다. 새로운 브랜드와 매장이 집중적으로 문을 열기 때문. 새로운 브랜드가 도입돼 매장을 꾸미게 되면 김 대리는 출입구의 위치부터 매장에 들어온 고객의 동선(動線), 간판부터 시작해 매장 내외의 인테리어, 가구 디자인 등을 전체 개념에 맞는 ‘일관된 시각’에서 결정해야 한다.
이 때문에 인테리어 지식과 감각만으로는 능력의 한계를 느낀다고. 제품의 기획부터 상품을 보는 눈, 영업 현장경험까지 쌓아야 진정한 최고의 패션 인테리어 디자이너이자 ‘비주얼머천다이저’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김 대리의 설명이다.
“루이뷔통 같은 세계적인 브랜드는 전 세계 매장의 인테리어를 엄격히 통일해 적용하죠. 한국의 패션 브랜드가 세계적 브랜드와 차이나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제는 한국의 패션산업도 ‘무엇’을 파느냐의 수준을 넘어서 ‘어떻게’ 팔 것인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제가 할 일은 더욱 많아지겠죠.”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국내 패션 전문가들은 ▼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패션분야의 디스플레이 전문가들은 미대나 의상학과를 졸업한 뒤 별도의 전문가 과정을 거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코오롱패션연구원(FIK)과 SADI(Samsung Art & Design Institute), 국제복장학원 등에 관련 과정이 개설돼 있어 패션분야 디스플레이 교육을 받을 수 있다. 대구 대경대 등 지방대학에도 디스플레이 관련 학과가 속속 개설되고 있으며 일부 대학의 의상학과에서는 선택과목으로 패션 디스플레이를 가르치고 있다. 미국 뉴욕에 있는 파슨스 디자인 스쿨, FIT 등의 전문학교에는 패션 디스플레이와 패션 인테리어 등을 모두 포괄하는 ‘비주얼 머천다이징’ 과정이 개설돼 있어 많은 한국 학생이 유학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 취업이 가능한 분야는 LG패션, 제일모직 같은 대기업이나 중소 패션업체, 백화점이나 할인점 등 대형 유통업체 등이다. 한국 패션산업의 한계 때문에 아직까지 특별히 높은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지만 관련 업계에서는 반드시 필요한 인력이다.
패션 인테리어 전문가들은 1990년대까지 대부분 미대 산업디자인과 출신들이 주류를 이뤘으며 여기에 대학 건축학과 출신들이 일부 참여했다. 최근에는 홍익대, 국민대 등 전통적으로 디자인 부문이 강한 대학과 전문대에서 전환한 지방대학에 인테리어학과, 실내 디자인과 등이 속속 개설되고 있다.
주로 패션 관련 매장의 인테리어를 맡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주택 음식점 카페 등을 인테리어하는 쪽보다 인기가 낮지만 한국사회가 고도화될수록 각광을 받을 전망이다.
같은 인테리어 분야지만 주택, 카페 인테리어와는 달리 패션 상품의 컨셉트를 완전히 이해하고 상품을 최대한 부각시킬 수 있는 인테리어를 해야 하는 만큼 마케팅 분야의 지식을 갖추면 금상첨화. 패션 디스플레이어와 마찬가지로 패션업체나 백화점 등에 수요가 많다.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