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어쩌면 가장 까탈지고 도도한 예술일지 모른다. 다른 예술들은 그래도 가급적 감상자의 처지를 배려하는데 미술은 나 몰라라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문학이야 책의 형태로 독자의 베개 밑까지 다가가지만, 미술은 전시장에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린다. 공연예술은 관객을 앉혀 놓고 자신을 풀어 보이지만, 미술은 관객에게 서서 자신을 우러러보도록 요구한다. 문학이나 음악은 스토리를 제공하거나 기승전결(起承轉結)의 과정을 느끼게 해 뭔가 충실히 자신을 드러낸다는 인상을 주지만, 미술은 달랑 어느 한 장면, 혹은 어느 한 순간을 보여준 뒤 알아서 전체를 이해하라고 ‘윽박지른다’. 이런 미술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일반의 관심을 덜 사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내가 하는 일은, 미술이 사실은 그렇게 고고하고 까탈진 예술이 아니며, 알고 보면 매우 속 깊고 매력적인 예술임을 설명하고 전하는 일이다.
▼서서 봐야하고 설명도 적지만…▼
어릴 때부터 미술에 대해 내가 갖고 있던 의문 한 가지는, 왜 미술작품은 다른 예술작품처럼 감상하다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으냐 하는 것이었다. 제아무리 슬픈 주제를 그린 것이라 해도 미술작품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은 많지 않다. 나 또한 이런저런 문학작품과 음악작품을 감상하다 눈물을 흘린 적이 있지만, 미술작품 앞에서는 눈물을 흘린 기억이 거의 없다. 이런 점을 지적해 혹자는 미술이 다른 예술처럼 영혼을 울리는 힘이 약하고 따라서 차원이 낮은 예술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미술이 다른 예술과는 다소 다른 성격의 감상적 특질을 지닌 예술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미술은 감정적 몰입을 통한 카타르시스의 기회를 별로 주지 않는다. 미술은 그보다는 관조 혹은 명상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유도한다. 감정의 부침을 통해 울고 웃게 하기보다는 정지된 장면을 끝없이 바라봄으로써 마음을 정화하게 한다. 물론 전위미술 가운데는 비디오 아트처럼 동영상이 중심이 된 분야도 있지만, 현재 국제화랑에서 전시 중인 빌 비올라의 작품에서 보듯 그 뿌리는 여전히 정적인 관조의 세계에 두고 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미술은 현대인들에게 오히려 좋은, 적극 권장할 만한 예술이다. 속도와 물량, 자극에 치인 영혼을 차분한 관조와 사색, 명상의 자리로 초대해 치유의 기회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예술이 치유의 힘이 없겠는가마는, 사회가 복잡해짐에 따라 ‘쿨’한 것을 선호하게 된 현대인에게 정지와 관조의 맥락을 제공하는 미술은 그만큼 시대적 매력을 지닌 예술이라 하겠다.
어쨌든 나는 바로 미술의 이런 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 의미와 가치를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다. 그것이 나의 업이라는 게 그렇게 좋을 수 없다. 나의 꿈은 미술의 이런 장점과 미술이 주는 혜택을 모든 사람이 느끼고 누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투어를 하고 방송 출연을 하고 전시를 기획하는 등의 모든 일들이 이와 관련돼 있다. 어쩌면 예술의 가장 위대한 힘은 창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감상에 있는 것인지 모른다. 감상이야말로 진정한 창조이다. 감상을 통해 치유된 우리는 진정 새로운 피조물인 것이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에서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보다 한나절을 보낸 반 고흐는 폐관 시간이라는 친구의 말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관조-명상에 '치유의 힘' 있어 ▼
“계속 보게만 해 준다면 내 수명에서 10년이라도 내줄텐데.”
미술 감상은 찰나를 영원으로 이어준다. 아직 우리 사회에는 그 이음줄의 가치를 이해하는 이가 많지 않다 할지라도 나는 평생 부지런히 이 이음줄을 잇고 싶다. 언젠가는 그 씨줄과 날줄 위로 무수한 위로와 치유의 에너지가 오고갈 줄 믿기 때문이다. 그 보람이 나를 이끈다.
▼약력 ▼
△1961년생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1984년) △동아일보 출판국 기자(1986∼88년) △한겨레신문 문화부 기자(1988∼93년) △저서:‘서양화 자신있게 보기’,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체험’, ‘명화는 이렇게 속삭인다’ 등
이주헌 학고재 화랑 관장·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