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들이 ‘돈 될 만한 사업’이다 싶으면 업종과 영역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고 있다. 기업의 이 같은 움직임은 요즘 대기업에 자금이 넘치는 데다 마땅한 투자처도 찾기 힘들어 ‘문어발 확장’이라는 비판을 의식할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적법한 수익추구는 기업의 존재이유’라는 시장논리가 확산되어가는 경제계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너무나 흔한 사례=최근 왕성한 사업확장에 나서고 있는 코오롱그룹은 구조조정본부 안에 신규사업전담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몇 년간 017 사업권 매각 등을 통해 마련한 자금을 활용할 만한 사업을 찾는 게 일이다. 여행·레저 전문 벤처기업인 ‘넥스프리’ 등이 그 결과물. ‘돈 되는 건 다 한다’는 게 팀의 내부방침이다. 신규사업들은 아직 뚜렷한 성과를 내진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웅열 회장이 이 팀의 활동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어 신사업 진출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전망이다.
정유회사로 잘 알려진 SK㈜. 그러나 사업보고서의 사업목적을 들여다 보면 ‘정유회사가 맞나’ 싶을 정도다. 28가지 사업 목적 중 정유와 관련된 항목은 5가지 가량. 나머지는 스포츠마케팅 보험 여행 레저 교재출판 자동차매매 등. 정유업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본 회사측이 새 수익사업을 찾는 과정에서 추가된 항목들이다.
최근 공격경영에 나서고 있는 이수그룹도 기존의 화학 및 건설업체 이미지를 벗어던지고 백화점식 업종 확장에 나서고 있다. 대신생명 인수 실패로 금융업 진출에는 일단 제동이 걸렸지만 외식업 투자를 계획 중이다. 현재 일본 외식산업에 대해 집중 연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창업주인 부친으로부터 경영권을 넘겨받은 중견 W그룹의 한 계열사 사장은 “책상 위에는 회사 내외부에서 작성된 신규사업 제안서가 여러 건 쌓여 있다”며 “어떤 사업이든 수익성만 좋으면 업종에 구애받지 않고 해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프랜차이즈는 대기업 몫=이처럼 대기업의 무차별적 진출로 가장 눈에 띄게 업계 구도가 바뀌고 있는 곳이 프랜차이즈 시장이다. 원래 소자본 중심이었던 시장이었으나 최근 들어 대기업들의 각축장으로 변하고 있는 것.
현재 대기업을 본사로 둔 프랜차이즈는 편의점 커피전문점 제과점 아이스크림점 차량관리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무역이 주업무인 현대종합상사는 일본에서 ‘월코트’라는 환경개선 촉매제를 수입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사업에 나서고 있다. 태양광 등을 이용해 실내의 유해 유기 물질을 분해해 준다는 것.
CJ는 서울 신촌의 계열 금융사 건물에 ‘투썸플레이스’라는 카페를 내면서 유럽형 정통카페 체인업을 시작했다. LG그룹에서 분리된 아워홈은 일본식 돈가스 전문점 ‘사보텐’을 내고 있다. 태인샤니(파리바게뜨)의 ‘배스킨라빈스31’이 선점한 아이스크림 전문점 시장에는 롯데가 ‘나뚜루’ 브랜드로 추격하고 있다. 제과점도 1000여개 점포를 보유한 태인샤니에 CJ가 ‘뚜레쥬르’ 브랜드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창업 컨설턴트인 이형석씨는 “벤처 거품이 빠지면서 새로운 투자 대상을 물색 중인 대기업들이 프랜차이즈 사업으로 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찬반 논란=대기업 프랜차이즈는 ‘공신력과 자본력을 갖춘 브랜드의 등장’이란 점에선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그동안 프랜차이즈 본사가 부실한 바람에 가맹점 점주가 피해를 보는 사례가 워낙 많았기 때문.
그러나 부정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서울 강남에 반찬가게를 연 두산식품에 대해선 “대기업이 어떻게 동네 반찬가게까지 탐내나”라는 지적이 있다. 중소기업들이 이미 시장을 형성해놓고 있던 화장품 전용 냉장고 시장에 삼성전자가 뛰어들자 새삼 ‘중소기업 영역 침범’ 논란이 일어났다.
한 프랜차이즈 업체는 “대기업들이 소규모 자영업자들 영역에까지 쳐들어오는 통에 이젠 대기업의 우산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소자본 창업도 못하게 됐다”고 비판했다.
이 같은 지적에 대해 대기업측에서는 “아직 ‘중소기업 고유업종’ 주장을 펴는 것은 시대흐름에 크게 뒤떨어진 사고방식”이라고 반박한다. 자유기업원 이형만 부원장은 “어떤 업종에서든 대기업의 발목을 묶어놓으면 결국엔 외국기업에만 좋은 일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