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행량 교수
지난 30년간 미국 언론은 절대(絶對)언론이었다. 미국 언론이 만든 스타는 스포츠 연예 비즈니스 정치 등 각 분야에서 세계의 모델로 추앙받으면서 미국패권주의의 도구가 됐다. 마이클 조던, 마이클 잭슨, 빌 게이츠 등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자 세계인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미국의 신문 방송 통신사는 세계를 대상으로 정보를 판매하며 수익을 올릴 뿐 아니라 언론경영이나 취재기법, 미디어 테크놀로지 분야에서도 모델이 됐다.
이런 미국 언론이 이라크전쟁을 기점으로 무너지고 있다. 미국 언론이 이라크전쟁에 대해 ‘스타 부시, 악당 후세인’이라는 구도로 보도하고 있으나 수용자들이 받아들이는 양상은 딴판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대한 보도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부시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당초 예상과는 다른 것이다.
이라크 바그다드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궁에 미영 연합군이 폭격하는 장면을 내보낸 CNN. -AP 연합
지금까지 CNN과 반대되는 시각으로 보도하는 방송 채널은 거의 없었다. 세계인은 CNN의 중계에 일희일비해야 했다. 하지만 9·11테러 이후 빈 라덴에 대한 보도로 주목받은 알 자지라 방송이 상황을 바꾸고 있다. CNN 등 미국 방송의 중계를 진실이라고 믿어온 세계인이 알 자지라를 통해 전쟁의 또 다른 면을 보게 된 것이다.
CNN 등 미국 언론이 신뢰를 상실한 것이 언론 탓만은 아니다. 미국 정부와 군부의 말을 일방적으로 전달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다. 정부의 언론 통제와 전황 보도에 대한 ‘발표저널리즘’이 미국 언론의 신뢰도를 하락시킨 것이다.
미국 언론이 받고 있는 신뢰는 미국이 구축해 온 위성이나 케이블 등 정보유통망과 함께 미국패권주의의 두 축이었다. 그러나 알 자지라 방송이 바로 미국이 개발해온 위성 덕분에 등장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제3세계 국가들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정보주권과 새로운 정보질서 운동이 사실상 미국 덕분에 가능해진 것이다.
미국 미디어 패권을 상징하는 CNN과 뉴욕 타임스 같은 유력 언론사는 신뢰의 산물이다. 개인과 기업, 국가를 신용으로 평가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뢰 없는 언론이 전달하는 정보는 한낱 소음이자 쓰레기에 불과하다.
인터넷이나 케이블 등 뉴미디어가 발달한다 해도 언론의 뿌리는 객관성과 전문성에 바탕을 둔 신뢰다. 신뢰를 잃은 언론은 상업적 생존이 위태롭고 정치나 자본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이라크전쟁에 대한 잇단 과장 및 오보로 미국 언론이 신뢰를 상실하는 것은 단순히 언론만의 추락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곧 세계라는 공식이 와해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그 신화가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는 않겠지만 점진적으로 와해될 것이다.
허행량 세종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image@sejo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