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 사는 30대 초반의 ‘남자 셋, 여자 셋’의 일상과 섹스, 일을 둘러싼 소동을 그린 미국의 시트콤 ‘프렌즈’는 요즘 국내에서도 케이블 TV로 방영돼 인기가 높다. ‘마녀가 더 섹시하다’에서는 이 드라마를 통해 뉴욕 여피들의 사랑과 결혼, 가족관을 경쾌하게 짚어낸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마녀가 더 섹시하다:김순덕의 뉴욕일기/김순덕 지음/348쪽 9800원 굿인포메이션
“대통령도 우리처럼 가끔 친구들을 만나서 수다를 떨어야 가슴이 시원해질까?”
이런 질문은 매우 오래 전부터 내 가슴속에 가지고 있던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얼마 전에 그 답을 알았다. 대통령을 만나서 물어 본 일도 없이 나 스스로 깨달았다. 대통령일수록 수다 떨 수 있는 친구가 더 필요할 것이다.
나는 사람 대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학생을 가르치다 보니 자연히 사람을 대하는 일이 많고, 쉽게 말해서 ‘입’으로 먹고사는 편이다. 그런데도 가끔은 남이 안 보는 곳에서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며 속을 풀어야 시원해진다. 미운 사람의 흉도 보고 세상일에 대해 욕도 하며 타령조로 털어내는 것이다. 하물며 대통령은 업무의 중압감에 비례하여 풀어야 할 응어리가 더 클 수밖에.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쏟아 놓고 나면 혹시 누가 보지 않았을까, 누가 듣지는 않았을까 겁이 난다. 워낙 남을 의식하며 사는 데 습관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 하더라도 이 말을 하면 나를 너무 속물이라 흉보진 않을까 걱정하며 상대방의 눈치를 살핀다. 상대방 수위에 맞추어 내 속내를 보여준다. 그러다가도 어느 선을 넘었다 싶으면 방금 뱉었던 말을 희석하기 위하여 또다시 말꼬리를 돌린다.
이 책은 인터넷 동아닷컴에서 150만 조회수를 기록한 인기 코너 ‘김순덕의 뉴욕일기’를 정리하고 전체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새 칼럼을 넣어 편집한 책이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친구의 수다를 엿듣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용모가 권력이다, 내 몸이 나를 배반한다, 공부가 가장 확실한 투자다, 결국은 학벌이다, 능력은 평등하지 않다, 유전자 코드는 노력에 앞선다 등의 거침없이 쏟아내는 촌철살인의 비수들은 나의 가슴에 꽂힌다. 마치 나의 가슴속에 비밀스레 품고 있는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맞혔을 때 당하는 난처함과 당혹함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덧 내 몸속에는 당혹감보다 카타르시스가 울려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너무 처절하게 몸으로 부딪치며 깨달았지만, 하도 치사하고 창피해서 차마 내 입으로 말하기 싫은 그런 것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런 말들을 내 입으로 하진 않고 털어냈다. 정말 마녀로 분장한 미녀의 도발은 거침이 없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일상이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본 9·11테러 이후 미국의 변화, 정치와 경제의 추악한 내통, 있는 계층의 추락하는 도덕과 신뢰의 모습이라니 더욱 나를 놀랍게 한다. 한국이 얼마나 미국화 되어 있는가를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끝으로 나는 이 글이 나오는 토요일 아침에는 조금 일찍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내보다 먼저 신문을 집어 들고 화장실에 들어가야 한다. 이 글이 나온 페이지를 호주머니 속에 접어 넣고 나오며, 이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웬 일인지 신문 한 장이 빠져 들어왔네.” 20여년간 코트 하나만 사려 해도 내 눈치를 살피던 아내가 이 책을 읽은 후에 정색을 하면서, “나 자동차 하나 뽑았으니 그런 줄 아세요”라고 말하면 정말 난감하기 때문이다.
이광형 KAIST 국제협력처장·바이오시스템학과 미래산업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