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공기 준수’를 다짐하는 비석 앞에 선 박태준 당시 포철 사장과 건설요원들. -동아일보 자료사진
《인사가 만사라고 한다. 사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조직과 집단의 운명이 판가름난다는 얘기다. 기업과 국가가 가장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인사란 곧 사람을 뽑아 일할 기회를 주고, 그 결과를 평가하는 일련의 과정이다. 끊임없이 피드백되는 그 과정이 누구나 수긍할 만큼 공정해야 조직이 산다. 그러나 사람이 사람을 평가하기란 실로 어려운 일이다. 고대 중국에선 인물감별사란 직업까지 있었다고 한다. 당신은 사람을 보는 눈이 있습니까, 당신은 능력만큼 인정받고 있습니까, 이번 인사에 만족하십니까, 헤드헌터들은 당신의 몸값을 어느 정도나 매길까요…. 오늘부터 인사에 얽힌 다양한 얘기들을 소개하는 새 시리즈 ‘인간 포석-인사의 세계’를 시작한다.》
▼박태준 前총리(上) ▼
‘철강왕’으로 통하는 박태준(朴泰俊·76) 전 국무총리는 25년간 포철(현 포스코)을 이끌면서 한국을 세계 최고수준의 철강 생산국으로 끌어올렸다. 1968년 불과 29명으로 출발했던 이 기업이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그는 어떤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썼을까.
4일 서울시내 한 레스토랑에서 만난 박 전 총리는 직원들이 ‘순리대로 일하면 승진하고 미래가 보장된다’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자신의 인사철학이었다고 소개했다. 직원들이 인사의 공정성을 불신하게 되면 당장은 버티지만 10년, 20년 뒤엔 기울어지고 만다는 얘기였다. 그의 이런 신념은 포철을 맡기 전인 66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일하면서 굳어졌다. 그때의 경험담이다.
“유능한 과장 한 사람이 있었는데, 어느 날 편지 한 통을 건네줘요. 뜯어보니 그 과장을 승진시켜달라는 대통령경호실장의 편지더군요.”
그는 이틀간 고민한 끝에 그 과장을 내보내기로 결론을 내렸다. 취임사에서 ‘인사는 공정히 하겠으며, 권력의 청탁에는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으니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 이 소문은 삽시간에 퍼졌고 그 뒤로는 청탁하는 사람이 없었다.
포철에서도 ‘청탁 배격’이라는 원칙을 지키려고 애를 썼다. 당시 자신에 대한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신뢰가 바람막이가 되기도 했지만 청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일부 권력자들의 보복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가택 수색만 세 차례나 당했다.
포철의 인사관리 기준은 연공서열과 발탁의 조화. 조직의 안정성과 탄력성의 조화를 위해 ‘과장 이하는 연공서열, 과장 이상부터는 발탁 개념’으로 운영했다.
기본은 시스템이었다. 계량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인사카드에 기록했다. 발탁의 경우도 첫 번째 기준은 업무 실적과 통솔력이었다. ‘깜짝 인사’나 문외한이 어떤 분야의 책임을 맡게 되는 일 따위는 없었다. 발탁 인사에선 그의 ‘눈’을 통과하느냐가 또한 중요했다.
“현장에서 늘 직원들을 관찰했습니다. 보고를 듣고 대화하는 중에 그 사람의 인품과 내공 등을 파악했지요. 자기 업무에 얼마나 정통한지, 그걸 다른 부서나 회사 전체와 어떻게 연결시키고 있는지…. 계장이면서도 과장, 부장의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과장 부장의 직위를 갖고 있으면서도 계장 수준밖에 생각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보고만 듣고서도 그 직원의 ‘모든 것’을 파악하려면 최고경영자가 그 업무에 정통해 있어야 한다. 포철에서 인사 업무를 오래 맡았던 여상환(余尙煥) 국제경영연구소 원장은 “현장에서 박 사장은 카리스마적 존재였다”고 회고한다.
“완벽주의인 데다 업무의 전 공정을 꿰뚫고 있었지요. 공정의 60%를 진행시킨 작업도 하자가 발견되면 다이너마이트로 폭파시키고 다시 하라는 식이니, 부장이건 이사건간에 그 앞에 서면 벌벌 떨었어요. 이 과정에서 거리낌없이 소신껏 말할 수 있는 사람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곧 지적받을 게 없을 정도로 완벽히 일을 해놓았다는 뜻도 되니까요.”
박 전 총리의 인사의 또 다른 특징은 ‘과정 충실주의’. 결과보다는 동기와 과정의 순수성을 높이 샀다. 한번은 공장에 큰 화재가 나 박 전 총리가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하기까지 했으나 그는 사고의 불가피성을 들어 담당자의 책임을 묻지 않았다. 반대로 온정주의는 배격했다. 자질이 없고 회사에 대한 기여도가 낮은 사람은 가차없이 보직을 주지 않았다. 무보직 3개월이면 자동해임이다. 손에 피묻히기 싫다고 방임하다가는 다른 직원들의 의욕까지 깎는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70년대 초반 서울의 한 대학 총장이 포철을 둘러보고는 “미친 집단같다”며 “전 사원이 건강검진을 받아보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다는 ‘포철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져 나갔다.
서영아기자 sy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