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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0일과 꿈]이용수/월드컵 결승진출 그날까지

입력 | 2003-04-09 18:41:00


초등학교 시절 날마다 삼삼오오 친구들과 함께 골목에서 축구를 했다. 이미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 공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둑어둑한 좁은 골목길에서 정신 없이 ‘골목축구’에 몰두했다. 딸 여섯 이후에 얻은 ‘귀한 아들’이 축구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셨던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공을 찼고, 팀을 만들어 다른 동네 아이들과 경기를 하기도 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축구가 좋았다. 국가대표선수의 꿈을 품고 닳아빠진 축구공과 씨름하며 지냈다.

▼골목축구 때부터 키워온 꿈 ▼

동료들과 나의 축구에 대한 열정은 결국 초등학교 정식 축구팀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서울체육중고등학교, 서울대, 해병대, 상업은행, 럭키금성 프로축구단 그리고 할렐루야 프로축구단까지 선수생활을 계속하면서 꿈에 그리던 국가대표선수는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팀 내에서는 줄곧 필요한 선수로 인정받았다. 체력 및 체격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팀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그 역할을 해내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1986년 축구 선수의 길을 접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학교시절부터 공부를 조금씩 하기는 했지만 미국 대학에서의 학업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늘 궁금하게 생각했던 생리적 변화를 공부하고 싶어 운동생리학을 전공으로 정했지만 그 과정은 처음부터 험난하기만 했다. 남보다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영어를 잘하는 편도 아니었으므로 길은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그것은 ‘시간 싸움’이었다. 즉 다른 학생이 4시간 공부하면 8시간 공부한다는 각오로 임했다. 강의 첫 시간부터 시험에 대비해 예상문제를 만들고 그 답안을 영어로 미리미리 만들어 ‘무식하게’ 외우는 방법으로 버텨나갔다.

귀국 이후 지금까지도 ‘시간 싸움’의 원칙은 지켜지고 있다. 철저한 준비와 아낌없는 시간 투자는 교수로서의 역할을 간신히 감당하게 하는 밑받침 역할을 하고 있다.

2000년 11월 초 우여곡절 끝에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직을 맡게 되었다. 기술위원장의 역할이 칭찬보다 책임추궁을 받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축구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수락했다. 단기 목표는 2002월드컵 16강 진출을 위한 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이었고, 연령별 유소년 대표 및 지도자 육성을 중기 목표로 삼았다. 이전 월드컵대회 실패의 경험을 돌이켜보면서 대표팀 경기력 향상을 위한 방향을 정했다. 자신감 결여에서 비롯된 위축된 플레이, 감독의 전술변화 대응능력 부재, 상대팀 분석 미흡 등이 그동안 월드컵대회에서 1승도 거두지 못했던 주요인이었다.

우선 월드컵 무대 경험이 많은 거스 히딩크 감독을 영입했고, 대표팀은 전 세계를 일주하다시피하며 세계 강팀들과 경기경험을 갖도록 노력했다. 우리 선수들이 가급적 축구 문화가 발달한 나라에서 원정 경기를 해 경기장에서 스스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도록 했고, 월드컵 무대 홈경기의 이점을 깨달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월드컵 기간 중 경기결과에 대한 걱정으로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지만 고비마다 온몸을 아끼지 않고 달리고 또 달렸던 선수들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경기장 안팎에서 붉은 티셔츠를 입고 열렬히 응원해준 온 국민의 성원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히딩크 영입 4강기적도 일궈내 ▼

이제 다시 학교로 돌아와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고 있지만 마음 속에는 늘 두 가지 꿈이 있다. 우리 선수들이 월드컵 결승전에서 뛰는 꿈과, 내가 어릴 적 골목에서 축구를 마음껏 했던 것처럼 우리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축구를 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꿈이 그것이다.

▼약력 ▼

△1959년 생 △서울대 체육교육과 석사, 미국 오리건주립대 운동생리학 박사 △상업은행(1983년) 할렐루야(1985년)에서 선수활동 △한국체육과학연구원 선임연구원(1990∼1993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2000∼2002년)

이용수 세종대 교수·전 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장·KBS 축구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