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리나 지망생 알리샤(레오노르 발팅)는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지 4년째. 알리샤를 짝사랑하던 베니그노(하미에르 카마라)는 간호사가 돼 그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여행잡지 기자 마르코(다리오 그란티네티)와 여자 투우사 리디아(로사리오 플로레스)는 서로 실연의 아픔을 딛고 사랑에 빠지지만 리디아는 투우장에서 소의 공격을 받고 식물인간이 된다. 병원에서 조우한 베니그노와 마르코는 서로의 처지에 깊은 공감을 느끼며 가까워진다.
스페인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그녀에게’(Hable con Ella)는 외로움이라는 주제에 천착한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은 모두 외롭다. 베니그노도 마르코도, 아버지와 단 둘이 살았던 알리샤도, 애인과 헤어졌던 리디아도, 베니그노를 짝사랑하는 동료 간호사도, 알리샤의 발레선생 카타리나도 외롭다. 베니그노는 정신과 의사와의 상담에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외로움”이라고 답한다.
윤리와 정상의 잣대로 재단할 수 없는사랑과 사람 사이의 교감을 그린 영화 ‘그녀에게’. 맨 아래 사진은 영화 속에 삽입된 피나 바우쉬의 공연 ‘마주르카 포고’ 사진제공
올댓시네마
이 외로움 때문에 베니그노는 의식없는 알리샤에게 끊임없이 말을 건넨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이 영화에 대해 “고독 질병 죽음 광기에 대항하는 수단으로서의 ‘말’에 대한 영화”라고 말하기도 했다. 베니그노의 헌신은 병적인 사랑 혹은 광기어린 집착일 수도 있지만 자신과 마찬가지로 외로움을 가슴에 품은 주변사 람들과 ‘말’로 소통하면서 위안을 얻는다.
베니그노가 혼수상태의 알리샤를 강간한 혐의로 감옥에 가는 설정은 충격적이나 관객은 오히려 베니그노가 갖고 있는 타자에 대한 열망을 동정과 연민의 시선으로 받아들인다. 감독은 베니그노가 강간을 했는지의 여부는 여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었다.
알모도바르 감독의 전작을 보지 않은 관객에겐 영화 ‘그녀에게’는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갖는 의미를 알아채기 어렵다. 그는 ‘욕망의 낮과 밤’ ‘키카’ 등 인간의 뒤틀린 성적 욕망을 충격적 영상으로 보여주며 도덕주의자가 혐오할 영화만 만들어왔다. 프랑코 독재 정권 아래 청소년기와 20대 초반을 보낸 그는 억압 속에서도 내면에 끓고 있는 인간의 욕망을 영화를 통해 분출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 그의 작품엔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윤리의 상식에서 납득하기 어려운 주인공은 여전하지만 ‘라이브 플래쉬’(1997) ‘내 어머니의 모든 것’(1999)에서 그는 등장 인물의 고뇌와 관객과의 공감을 유도한다.
‘그녀에게’는 이런 변화의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세상의 윤리가 끌어안지 못하는 인간의 욕망을 섬세하고 잔잔하게 그려내 ‘정상’인 척 살아가는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만든다.
현대 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의 ‘카페뮐러’의 장면을 삽입하고, 무성 영화를 따로 만들어 영화속에 집어넣는 재치있는 연출 감각은 여전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이 2002년 최고의 영화로 선정했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본상을 받았다. 18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
▼알모도바르 감독 인터뷰▼
―‘그녀에게’는 어떤 영화인가?
“이 작품은 인간의 고독을 이겨나가는 두 남자의 우정을 담고 있다.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이 레즈비언 연극배우, 임신한 수녀, 아들을 잃은 어머니 등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여자들의 이야기’라면 ‘그녀에게’는 들을 수 없는 사람에게까지도 자기 삶을 이야기하며 인간 사이의 소통을 꾀하는 ‘남자들의 이야기’다.
―한번도 작업해보지 않은 4명의 주인공과 작업하고 난 소감은?
“등장 인물의 복잡한 내면을 표정과 눈빛만으로 연기해냈다. ‘리디아’ 역의 레오노르 발팅의 연기도 뛰어났다. 그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있기만 한다고 식물인간을 연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피부는 작은 접촉에도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는 영화 중반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지만 두 남자주인공의 연기에 조금 뒤지지 않았다. 그의 몸은 표정이 풍부했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 피나 바우쉬의 공연이 삽입돼 있는데, 어떤 의미인가?
“‘카페 뮐러’의 포스터에는 피나 바우쉬가 얇은 슬립을 입고 눈을 감은 채 탁자와 의자에 둘러싸여 양팔을 뻗고 있다. 나는 이 사진이 영화 속 주인공들이 머물고 있는 연옥의 이미지를 나타내는데 최적이라고 생각했다. 또 ‘마주르카 포고’를 보고 무용 속에 녹아있는 생명력과 낙관주의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결국 ‘카페 뮐러’와 ‘마주르카 포고’를 영화 앞뒤에 삽입키로 했다.”
―당신에게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그녀에게’는 관객과의 포옹을 꾀하는 영화다. 나는 모든 관객의 가슴에 기대고 싶다. 영화 속에서 리디아가 마르코의 등에 기댔던 것처럼 말이다. 포옹은 사람들에게 빛을 비춰 따뜻하게 해주는 것이다.”
김수경기자 sk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