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의 핵심 인사 가운데에는 공안사범 출신들이 적지 않다. 구속된 전력이 있는 이들이 워낙 많아 '별들의 정부'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다. 반면 이들을 수사했던 공안검사들은 대부분 현직을 떠났다.
● 최병국 vs 이호철
이호철 대통령민정1비서관과 한나라당 최병국 의원. 지금은 대통령 최측근과 제1야당 국회의원이지만 1981년 부림(釜林) 사건 때 두 사람은 공안사범과 공안검사로 마주쳤다.
부림사건이란 1981년 9월 부산지역 학생 및 재야인사 22명이 이적 표현물을 함께 공부한 혐의 등으로 구속된 사건. 그해 7월 서울지역 운동권 학생들이 무더기로 구속된 ‘학림 사건’에 이어 터진 일이다. ‘부림사건’은 ‘부산의 학림사건’의 준말.
부산대 총학생회장 출신인 이 비서관은 이 사건으로 구속됐고 이 사건 수사를 지휘한 공안검사가 최 의원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에는 노무현 대통령도 등장한다. 당시 구속된 재야 인사의 변호를 맡았던 김광일 전 의원이 노무현 변호사에게 도움을 청했고 노 대통령은 이를 계기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노 대통령은 “부림사건 변호는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다”고 자주 회고한다.
이후 이 비서관은 노 대통령과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게 된다. 이 비서관은 1988년 국회의원이 된 노 대통령의 보좌관을 시작으로 선거 때마다 노 대통령을 적극 도왔다. 노 대통령은 그를 “영혼이 순수한 사람”이라며 깊이 신뢰했다. 이 비서관은 현재 이광재 국정상황실장과 함께 ‘좌호철 우광재’로 불린다.
당시 주임검사였던 최 의원은 이후 한 차례 곤혹을 치렀다. 2000년 4월 한나라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울산 남구)에 출마한 그는 공안검사 전력 탓에 총선연대와 천주교 인권위원회 등으로부터 낙선운동 대상자로 지목됐다. 최 의원은 “부림사건은 부산 운동권이 지하로 들어가 처음으로 주사파 학습을 시작한 충격적인 사건으로 이들 바로 다음 세대가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을 일으켰다”는 반론을 펼쳤고 결국 금 배지를 달았다.
지난해 대선 때 최 의원은 “당시 변호는 김광일씨가 다했고 노 변호사는 서류만 들고 왔다 갔다하는 수준이었다” “고문만 물고늘어진 떨거지 변호사로 보고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고 냉소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 김원치 vs 유시민
1980년대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공안검사로 꼽히는 김원치 변호사. 그는 개혁국민정당 전 대표 유시민씨와 악연(惡緣)이 있다.
유씨는 지난 대선 때 노 대통령을 지지했으며 노 대통령과 ‘코드’가 비슷하다고 평가받는 정치인. 김 변호사는 대검 공안과장, 서울지검 1차장(공안1, 2부 총괄) 등을 지낸 대표적인 공안검사 출신이다. 그는 1984년 10월 서울지검 남부지청 공안부 시절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으로 붙잡힌 유씨를 처음 만났다.
당시 유씨는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대표였고 일부 서울대 학생들은 캠퍼스안에서 수사기관 정보원으로 추정된다는 이유로 네명의 '가짜 대학생'을 붙잡아 때렸다. 김 변호사는 유씨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고 유씨는 1년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유씨가 쓴 ‘항소이유서’가 널리 알려졌다.
두 사람은 20년 만인 지난달 검찰 인사 파동 때 다시 ‘같은 뉴스’ 안에 이름이 거론됐다. 대검 형사부장이었던 김 변호사는 검찰 통신망에 ‘검찰 인사 개혁의 정체성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새 정부의 검찰개혁을 정면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반면 유씨는 홈페이지에 ‘검사들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으로 검찰을 맹공하는 글을 올렸다. 이 두 글이 20년 전 ‘공안검사와 공안사범’이라는 인연과 연결되면서 화제가 됐다. 김 변호사는 20년 전의 유씨에 대해 “똑똑한 청년이었다”고 회고했다.
● 이용훈 vs 유인태
법무부 차관을 지낸 이용훈(李龍薰·76) 변호사는 유인태 정무수석, 정찬용 인사보좌관 등 현 정부의 실세들과 간접적으로 얽혀 있다. 이 변호사는 1960년대 서울지검 공안부장을 지낸 인물로 대법관 출신인 이용훈(李容勳·61) 변호사와는 다른 사람.
유 수석과 정 보좌관은 1974년 유신반대 시위 주도 학생들이 대거 검거된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각각 사형과 12년형을 선고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은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도 불리는데 인혁당 사건은 최근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 의해 ‘용공 조작 사건’으로 규정됐다. 유 수석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유신정부가 장난치는 줄 알았다”고 말한다.
이 변호사는 바로 민청학련 사건의 ‘전신’격인 1964년 인혁당 사건을 맡았었다. 인혁당 사건은 중앙정보부(중정)가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학생 41명을 붙잡아 북한의 지령을 받은 대규모 지하조직(인민혁명당) 소속이라고 밝힌 사건. 중정이 사건을 서울지검 공안부로 송치하자 당시 서울지검 공안부장이던 이 변호사와 김병리, 장원찬 검사는 증거가 부족하다며 기소를 거부했다. 청와대와 중앙정보부가 발칵 뒤집혔다. 결국 서울지검장이 구속기간 만료일에 당직검사를 시켜 관련자를 기소했고 이 변호사 등 세 검사는 사표를 냈다.
그 10년 뒤 민청학련 사건은 중정이 전담했다. 당시 관련 학생들의 배후로 1차 인혁당 사건 연루자들이 다시 엮였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유 수석은 4년4개월, 정 보좌관은 10개월간 복역했다.
이 변호사는 1979년 법무부 차관으로 공직에 돌아온 뒤 5공화국 시절 11, 12대 국회의원(민정당 전국구)이 됐다. 그는 민정당 의원총회에서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고 날치기 처리 요구를 거부하기도 했다.
● 최상엽 vs 안희정
나라종금의 대주주인 보성그룹으로부터 2억원을 받아 논란을 빚고 있는 안희정 민주당 국가전략연구소 부소장은 1986년 10월 건국대 사태 때 구속됐다. 이 사건 수사를 진두지휘한 대검 공안부장은 최상엽 전 법무부 장관. ‘공안검사의 대부’로 불리는 최 전 장관은 관련 기자회견 발표문 제목을 ‘공산혁명분자 건국대 점거 난동사건’으로 정하고 강력한 수사를 펼쳐 1287명의 학생을 구속했다.
고려대 애국학생회 조직부장이었던 안 부소장은 이 사건의 배후인물로 지목돼 구속됐다. 이후 그는 1987년 반미청년회 조직부장으로 전대협 출범의 산파 역할을 했고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 당선을 도와 ‘노 대통령의 왼팔’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최 전 장관은 1997년 법무부 장관을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