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10대 그룹 안에 들어가는 A사의 재무 담당인 김모 상무는 요즘 신규투자에 관한 한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그는 “회사 내부적으로 정한 투자수익률을 낼 수 있는 사업이 별로 없다”면서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 봐도 투자에 나서야 할지 해답이 나오지 않는다”고 털어놓았다.
이 회사가 내부적으로 정해 놓은 투자수익률은 IRR(Internal Rate of Return) 기준으로 12% 수준. 투자금액 대비 향후 수익을 따지는 이 지표는 단순화하자면 외부 차입금리에다 순수익률을 더한 수치다. 회사가 현재 금융권으로부터 빌려 쓰고 있는 대출금리는 7%대. 금리가 크게 떨어지기 전에 빌린 자금이 많아 차입금리가 시장 평균 금리보다는 다소 높은 편이다. 여기에 순수익률이 5%는 돼야 IRR가 12% 이상 나올 수 있으나 그런 사업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20년간 재무팀에 있으면서 신규투자를 담당해 온 그는 “과거와 비교하면 투자패턴이 ‘박리다매형’에서 ‘소수 정예형’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김 상무의 토로는 요즘 기업들이 전례 없는 저금리에도 불구하고 투자에 나서지 않는 내부 사정을 말해준다. 먹을 건 없는데 입맛만 까다로워진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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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춰서는 성장엔진
삼성전자는 작년에 자사주(보통주) 399만주(1조3293억원), 올 1·4분기(1∼3월)에는 310만주(8556억원)를 사들였으며 14일 올해 매입한 전량을 소각했다. 삼성전자가 최근 LCD와 반도체 등 핵심사업 외에 투자를 주저하고 자금을 자사주 소각에 쓰는 것도 같은 배경.
“이익을 남겨 돈은 있지만 현재의 투자수익률을 낼 만한 신규투자처가 없다 보니 잉여금을 배당하거나 자사주 소각으로 써버린 것”이라고 삼성 관계자들은 귀띔했다. 만약 수익률이 낮은 곳에 투자하면 기업가치(주가)가 떨어져 주주에게 오히려 손해가 된다는 것.
같은 얘기지만 ‘강화되고 있는 내부 투자수익률 기준’도 보수적 경영으로 이어진다. 외환위기 이후 많은 대기업이 경제적 부가가치(EVA)를 투자 기준으로 삼고 있다. EVA는 투하된 자본으로 얼마나 이익을 냈는가를 보여주는 경영지표. 삼성은 계열사 사장의 연간 실적을 평가할 때 EVA 70%, 연초와 비교한 주가 20%, 핵심인재 확보 10%로 매긴다.
1·4분기에 사상 최대의 경영실적을 올린 포스코가 올해 외부 차입을 전혀 하지 않기로 한 것도 EVA를 따진 결과다. 포스코의 이영훈(李榮薰) 자금기획팀장은 “투자대상도, 돈을 굴릴 만한 금융상품도 마땅치 않아 사실상 현금을 그대로 갖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1조원 이상 현금을 갖고 있는 포스코는 이 돈으로 올해 만기가 돌아오는 부채 1조2700억원을 갚고 시설투자 1조6000억원을 자체 자금으로 충당할 예정이다.
A사의 김 상무는 “요즘 다른 그룹 재무 임원들과 만나 얘기를 해봐도 만날 ‘돈될 만한 사업이 없다는 타령’뿐”이라면서 “게다가 대내외적 불확실성까지 겹쳐 대부분 기업이 신규투자는 접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했다.
신연수기자 ysshin@donga.com
이명재기자 mj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