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소설]8월의저편 292…손기정 만세! 조선 만세!(20)

입력 | 2003-04-14 18:43:00


우근은 마당을 한 바퀴 돌고 숨이 넘어가게 웃었다.

“와, 좋다! 이걸 신으니까 씽씽 달릴 수 있을 것 같다. 형, 고맙다!”

“국이 다 식는다.” 희향이 말했다.

건넌방에서 기둥시계가 일곱 번 울렸다. 그 소리 덕분에 생각이 났다는 듯 툇마루에 앉아 달리는 우근의 모습을 바라보던 박씨가 고개를 갸웃했다.

“동아일보가 정간이 됐다 카더라.”

“뭐라꼬예?” 우철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열무김치를 씹던 것도 잊었다.

“아까, 경성에서 경질(硬質) 고무가 도착했는데, 경성 사는 하용이가 가르쳐 주더라. 나흘 전에, 손기정이 금메달 땄을 때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아이가? 그때는 잘 몰랐는데, 가슴에 일장기가 지워져 있었다. 동아일보 기자가 수두룩하게 연행됐다고 카는데, 지금쯤 억시게 고문당하고 있을 끼다. 아이고.”

우철은 마루에 쌓여 있는 신문을 위에서부터 훑어 내려갔다. 그 사진은 8월 25일자 2면에 있었다. 표창대 위에 선 손기정은 세계의 정상에 서 있는데 월계관으로 눈언저리를 가리고 풀 죽은 해바라기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다. 하얀 긴소매 셔츠에 긴바지 차림인 일본 선수단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데, 가슴 한가운데 있어야 할 일장기가, 없다. 우철은 사진 설명을 읽었다.

‘영예는 우리의 손군’

상)머리에는 월계관, 두 손에는 월계수의 화분!

마라손 우승자 “우리의 용사 손기정 군”

하)마라손 정문을 나서 용맹하게 출발하는 손 선수(×표시)

침묵은 이씨 집안사람들 하나하나를 차례로 노려보았다. 미옥은 얼굴에서 얼굴로 눈길을 돌리고, 희향은 퀭하니 고정된 눈길로 왼손 약지에 끼고 있는 쌍가락지를 돌리고, 새 운동화를 신은 우근은 손기정처럼 우뚝 선 채 고개 숙이고, 꽉 깨문 아랫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주먹을 입에 대고 사진을 보고 있던 우철은 주먹을 펴고, 공기를 쓰다듬듯 손가락을 움직이면서 격정에 찬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곱씹어 뱉었다.

“제기랄 나가 되져라 개새끼 더러운 쪽바리.”

“그런 말 하면….” 희향이 말했다.

양화점 박씨가 떨리는 두툼한 손으로 앞머리를 끌어올리고, 큰소리로 코를 훌쩍거리고는 말했다.

“손기정 선수도 무사치 못할 끼다.”

“무슨 상관이가!” 우근이 소리를 질렀다.

“쉬!” 희향이 집게손가락을 세워 입술을 눌렀다.

글 유미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