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교수는 “이 사회가 당면한 기본적 모순의 한복판에 뿌리내린 지성만이 정직한 지성의 나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박주일기자
《경제학도로서 한국 사회에 대한 냉철한 인식과 20년 감옥 생활에서 얻은 사유의 깊이를 바탕으로 담담하게 써 내려간 아름다운 산문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는 신영복 교수(62·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감옥에서 사회로 돌아온 후 15년 동안 차분히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그는 이제 ‘존재’ 자체만으로 많은 이들에게 위안과 나침반이 되고 있다.》
▼책과 교실속에서 묻혀지낸 성장기는 '심부름 같은 삶' ▼
교사의 집안에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책과 교실을 통해 세상 보는 눈을 갖게 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이 유년 시절의 경험은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삶은 자신의 의식적인 선택이 아니었기에,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되기 전까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심부름 같은 길’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대학에서 경제학도 시절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비롯한 경제학 서적을 접하면서 사회를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책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대한 탁월한 분석서였다. 1988년 20년의 감옥 생활을 마치고 사회로 돌아왔을 때 한편으로 한국사회의 물량적인 변화를 보며 적잖이 놀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다지 생소하게 느끼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미 사회를 구조적으로 인식하는 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광복 직후 미군정에 의해 기본적으로 짜여진 한국사회의 경제구조와 정치권력의 틀이 지금까지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다.
제한된 독서밖에 허용되지 않았던 교도소에서 읽었던 동양고전은 그의 사고를 넓히는 좋은 계기를 제공했다.
인간관계에 관한 풍부한 담론을 담고 있는 ‘논어’는 사회와 인간에 대해 사고의 범위와 틀을 확장하는 계기가 됐고, ‘노자’와 ‘장자’는 인간의 문제를 자연과의 총체적 관계 속에서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는 이를 통해 사회구조 중심의 생각을 인간관계와 자연에까지 확장할 수 있었다.
▼20년 감옥생활…고전과 사람을 통해 세상을 새로 보다 ▼
지금도 그는 경제학, 철학, 시집 등 다양한 독서를 하고 있지만 생각이나 정서의 형성에 더 큰 계기를 제공한 것은 오히려 오랜 감옥생활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우선 20년의 감옥 생활은 자신에 대한 깊은 반성의 기회였다. 그는 이를 통해 현실에 뿌리를 깊이 박지 못한 자신의 ‘창백한’ 관념과 주관적 관념론을 반성했다.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인간에 대한 그의 이해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감옥에서는 동료들과 몇 년씩 하루 24시간을 같은 방에서 생활하면서 그 사람의 역사, 가족, 처지 등을 총체적으로 접하며 이해할 수 있었다.
책을 가지고 구성했던 사회론 대신, 가장 소외된 밑바닥 인생을 힘들게 살아온 사람들을 통해, 사회에 숨겨진 모순구조를 통해 사회를 새롭게 바라보게 됐다.
빨치산, 북한 안내원, 북한 정치공작원, 그리고 광복 전후 격동기를 살았던 노인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을 통해 역사를 다시 ‘읽었다’.
책을 통해 배웠던 역사는 이제 삶의 일부로서, 인간적 체취가 생생하게 느껴지는 것으로 생환(生還·살아돌아옴)됨을 인식할 수 있었다.
▼"사람은 이웃과 함께 살아간다"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
역사상 수많은 실천가들도 “나 자신의 계급적 성분만은 개조하지 못했다”고 술회했지만, 그는 20년의 감옥 생활을 통해 자신의 계급적 성분을 완전히 개조했다고 생각했다. 이미 양재(洋裁), 제화, 목공, 간판제작 등 여러가지 기술을 익힌 그는 구체적인 노동을 통해, 그리고 교도소 동료들과의 생활을 통해 스스로 계급적 성분을 바꿨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그가 출소한 후 다시 사회 속에 서게 되면서 그것이 어떤 점에서는 착각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의 변화는 이웃과 함께 변하는 것이지 자기 개인만 개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절감한 것이다. 그는 “어떤 이웃과 함께, 어떤 언어를 사용하고, 어떤 정서를 공유하는가 하는 사회적 입장에 따라 자신이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가 감옥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을 떠나 이제 새로운 사회적 입장을 수용하게 됨에 따라 그의 사고와 정서는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그가 받아들여야 할 현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최근 ‘존재론에서 관계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근대시민사회(자본주의)의 역사는 존재론적인 과정이었으며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 패러다임 자체가 관계론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패권적 국제질서나 우리의 삶을 황폐하게 하는 치열한 경쟁과 침탈의 구조가 이런 존재론적 논리에서 비롯될 뿐 아니라, 개인이나 집단이 타자와의 차별성을 통해 자기 정체성을 주장하는 오늘의 문화적 현실 역시 존재론적 구조의 다른 측면이라는 것이다. 특히 사회운동이 여러 갈래로 분립되고 있는 현상은 우리 사회의 가치중심이 취약해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역량의 구심력이 취약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회역량의 조직 수준이 높은 단계에서는 굳이 다른 것과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며 작은 단위의 정체성 같은 것을 주장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배타적인 ‘자기 정체성’ 주장은 사회의 조직 수준이 낮은 ‘정파 중심 단계’의 역량 소모”라고 지적한다.
▼출소후 한국사상사 몰두…통일-민족자주 없는 발전은 허상 ▼
1988년 출소 후 이듬해부터 성공회대에서 강의를 맡으면서 그는 경제학 이외에 자청해서 ‘한국사상사’를 강의하기 시작했다. 경제학 전공인 그가 한국사상사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결국은 우리 시대, 우리 과제를 중심으로 고민해야 한다”는 그의 믿음 때문이었다. 그는 감옥에서 경제학 서적이 반입되지 않았을 때 실학 이후의 한국사에 관한 책들을 구해서 읽었다. 특히 한학자인 노촌 이구영(老村 李九榮) 선생과 4년간 한 방에서 생활하며 한국의 역사와 사상에 대한 이해에 깊이를 더할 수 있었다. 그는 ‘한국사상사’의 과제는 한국사상을 고루 망라할 수 있는 코드를 찾는 것이라기보다는 현재 우리가 당면한 과제, 즉 통일, 경제적 자립, 민족 주체, 자주 등을 어떤 역사에 비추어 재조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민속, 미륵사상, 풍수론과 같은 사상사의 심층부분, 그리고 지식인 운동, 농민전쟁, 민중항쟁 등 민족사의 저변에 흐르는 변혁사상에 무게를 두고자 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안에 키우는 ‘지성의 나무’는 자기가 서 있는 곳의 토양, 바람과 햇빛, 그리고 주변의 다른 나무를 통해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
지성은 그 사회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과제와 맞닿아 있을 때, 다시 말해서 그 사회의 기본적 모순의 한복판에 그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있을 때 가장 ‘정직한 나무’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의 기본적 과제로 자본의 논리를 인간적 원리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주요과제로 통일과 경제적 자립 및 민족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꼽는다. 당면 과제는 이런 기본적 문제를 외면하고도 국제경쟁력을 높이기만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식의 ‘환상’을 청산하는 데서 시작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앞으로 다시 10여년…시대요구 정직하게 받들며 살 것 ▼
오랜 감옥 생활을 마친 후, 이제 그는 정말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실제로 개인의 삶이 개인의 뜻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는 “개인이 자기 인생을 살 때 그 개인의 삶 속에 그 시대가 얼마나 들어와 있는가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회의 격변으로부터 유리돼서 개인의 탑 속에 안주하는 것은 정직한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앞으로도 우리 시대의 요구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출소 후 자신이 가진 이념적 색깔이 보수계층의 공격의 빌미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말과 행동을 절제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참여의 방식과 활동의 공간은 얼마든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는 지난해 1년 동안 안식년을 맞아 강원도 산골에 칩거하면서 자료를 정리하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1988년 그는 감옥에서 20년의 삶과 생각을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편지 형식의 글로 담아냈다. 이제는 출소 후의 20년간 그가 부닥치고 고민해 온 사회와 인간의 문제들을 정리해 내려고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어려운 일은 “우리의 문화전통에 가장 근접한 글쓰기의 형식을 찾는 것”이라고 한다. “아마 앞으로도 10여년의 시간과 사색을 더 들여야 책으로 나오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그에게서 자신의 삶, 말과 글에 한 점 소홀함이 없는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김형찬기자·철학박사 kh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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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글 중에서…▼
“몸 가까이 있는 잡다한 현실을 그 내적 연관에 따라 올바로 논리화해 내는 역량은 책 속에서는 적은 분량밖에 얻을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독서가 남의 사고를 반복하는 낭비일 뿐이라는 극언을 수긍할 수야 없지만, 대신 책과 책을 쓰는 모든 ‘창백한 손’들의 한계와 파당성(派黨性)은 수시로 상기돼야 한다고 믿습니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중에서)
“처음으로 쇠가 만들어졌을 때 세상의 모든 나무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어느 생각 깊은 나무가 말했다. 두려워할 것 없다. 우리들이 자루가 되어주지 않는 한 쇠는 결코 우리를 해칠 수 없는 법이다.” (‘나무야 나무야’ 중에서)
“꿈은 우리로 하여금 곤고(困苦)함을 견디게 하는 희망의 동의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꿈은 발밑의 땅과 자기 자신의 현실에 눈멀게 합니다. 오늘에 쏟아야 할 노력을 모욕합니다. 나는 이것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위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더불어숲’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