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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寶庫가 폐허로]文字효시 '수메르인 점토판'등 훼손 우려

입력 | 2003-04-14 19:14:00


이라크 국립박물관 소장 주요 고대 유물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시대의 항아리. -동아일보 자료사진바빌로니아 시대의 실물 크기 청동 두상. -동아일보 자료사진기원전 3000년경 석회암으로 만든 조각 장식 물병. -동아일보 자료사진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 시대의 여인 두상. -동아일보 자료사진

《최근 바그다드가 치안 부재 상황이 되면서 이라크 국립박물관과 도서관이 송두리째 약탈당했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르고 있다.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문명발상지와 이슬람문화의 보고(寶庫)가 불과 며칠 만에 텅 빈 폐허로 변했다는 소식은 문화재 관련 학계는 물론 문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바그다드 이라크 국립박물관=28개의 전시실을 갖춘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이집트박물관과 함께 중동 지역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박물관으로 꼽힌다. 고고학 박물관으로는 세계적인 수준의 박물관으로 꼽힌다. 총 소장 유물은 30만점 이상으로 추정된다. AP통신은 이 중 17만점가량이 약탈당한 것으로 전했다.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걸프전 이후 유물 보호를 위해 1992년부터 2000년까지 휴관 조치됐었다. 99년부터는 전시실마다 병력을 배치해 24시간 감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약탈로 그간의 ‘문화재 보호 조치’는 모두 허사가 되고 말았다.

바그다드에는 모두 8개의 박물관이 있지만, 국립박물관을 제외한 다른 박물관들의 피해 상황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유네스코는 바그다드 외에 티크리트와 모술의 박물관도 공습 및 약탈의 피해를 봤다고 발표했다.

▽어떤 문화재가 약탈됐나=외신에 따르면 수장고까지 ‘털린’ 바그다드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가져갈 수 있는 거의 모든 유물이 약탈됐거나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 중 쐐기문자(설형문자)로 쓰인 수메르인의 점토판 조각들은 ‘인류 최초의 기록물’이자 ‘문자의 효시’로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학교, 세금, 판례 등의 기록이 점토판에 적혀 있으며 이번에 약탈된 유물 중에는 인류 최초로 설화를 인용한 문학 작품으로 꼽히는 ‘길가메시 서사시’ 서판(書板)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또 돈으로는 도저히 따질 수 없는 함무라비 왕조 법조문 서판(書板) 조각, 우르에서 출토된 은제 하프, 바빌로니아 시대의 청동 귀족 두상, 기원전 3000년경 만들어진 수메르 여인의 두상 등이 약탈됐을 가능성이 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한 함무라비 법전 서판은 프랑스가 가져가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 비석의 내용을 진흙판에 필사한 것이며 은제 하프는 기원전 2300년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 최고(最古)의 악기’이다.

이 밖에도 외신은 기원전 3000년경 우르크의 항아리, 바빌로니아 시대의 석상, 쉬브아드 여왕의 부장품인 황금 장식품 등이 약탈됐다고 전했다. 고대 바빌로니아의 나무 하프는 두 동강난 채로 발견됐다.

▽약탈, 훼손된 문화재의 의미=이라크는 인류가 최초로 문명을 일으킨 지역 중 하나. 메소포타미아문명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 즉 현재의 이라크와 시리아, 터키에 걸쳐있는 지역에서 발생했다. 이라크는 메소포타미아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는 고대 문명뿐 아니라 화려한 이슬람 문명의 중심 도시이기도 하다. ‘신드바드의 모험’이나 ‘알라딘의 램프’에서 보듯 고도(古都) 바그다드는 세계인에게 가장 친근한 도시다.

올 1월 이라크 국립박물관을 찾았던 이동은(李東恩·44) 한국외국어대 중동연구소 연구교수는 “바그다드 이라크 국립박물관은 지역적인 특성상 메소포타미아문명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다양한 종류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걸프전 때 망실된 유물을 지금껏 찾지 못하고 있는 선례에 비춰볼 때 이번에도 유물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바그다드 이라크 박물관을 방문한 바 있는 김성(金聲·45·성서고고학) 협성대 교수는 “우르의 은제 하프는 박물관 입구에 전시됐던 것으로 가장 먼저 약탈됐을 가능성이 높다”며 “이번 약탈은 인명 손실에 버금가는 문화재 손실”이라고 말했다.

박물관 답사기인 ‘나는 박물관에서 꿈을 보았다’의 저자 권삼윤(權三允·52)씨는 “이번에 털린 유물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인류의 보물”이라며 안타까워했다.

▽전쟁과 문화재 훼손의 역사=인류가 남긴 문화 유산에 대한 가장 큰 위협은 전쟁이었다. 17세기 그리스를 침공한 오스만 터키는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을 점령해 화약고로 사용했고, 이에 대응하는 베네치아 연합군이 파르테논 신전에 대포를 쏘는 바람에 신전의 지붕이 날아가고 말았다. 이집트의 ‘명물’ 스핑크스도 17세기 터키군에 의해 훼손됐다. 18세기 말 나폴레옹이 대포를 쏴 코를 날렸다는 설도 있으나 17세기 터키군이 부수었다는 것이 정설.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해 각종 조각과 회화를 파괴하거나 약탈했고, 에티오피아를 침공한 이탈리아는 오벨리스크를 세 동강 내서 자국으로 운반해왔다. 독일의 고도 드레스덴도 ‘융단 폭격’으로 파괴됐다. 91년 보스니아 내전에서는 크로아티아 중세 도시 두브로브니크가 공격당해 문화재가 훼손됐고 걸프전에서는 이라크 수메르 왕국의 중심 도시 우르에 400여발의 폭탄이 떨어지는 바람에 4000년 전의 사원이 파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처럼 시민들에 의한 ‘약탈’로 문화재가 훼손된 사례는 걸프전 당시 바스라 박물관이 약탈됐던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기 힘들다.

주성원기자 swon@donga.com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