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남덕우 전총리

입력 | 2003-04-15 18:51:00

1977년 3월 스위스를 함께 방문한 남덕우 전 경제부총리(중앙)와 서석준 전 경제부총리(오른쪽). 그해 11월 서씨는 불과 서른아홉의 나이에 남씨에 의해 기획원 차관으로 발탁됐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1976년 3월, 남덕우(南悳祐)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심흥선(沈興善·작고) 총무처 장관과 마주 앉았다.

“심 장관님, 정부 부처 국장에 별정직도 임명할 수 있도록 규정을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그럴 만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김재익(金在益)이라고 경제기획국장에 적임인 유능한 인재가 있는데 별정직이라서 규정상 안된다고 합니다.”

“경제기획국장이라면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총괄하는 요직인데 정말 그렇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네. 국가경제를 위해 꼭 필요한 인사입니다.”

“그렇다면 규정을 바꾸겠습니다.”

☞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 연재 리스트 보기

이렇게 발탁된 김재익 국장이 남 부총리의 기대에 부응했음은 물론이다. 기계식 전화교환기를 전전자교환기로 바꾸는 일을 주도, 정보기술(IT)산업의 초석을 닦은 것은 그의 대표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김 국장 밑에서 사무관 생활을 한 변양균(卞良均) 기획예산처 차관은 “김 국장에 대한 남 부총리의 신임은 남달랐다”면서 “심지어 승진이나 해외유학 기회가 생기면 경제기획국 직원들에게 맨 먼저 차례가 왔다”고 회고했다.

김재익은 5공화국이 들어서자 국가보위 입법회의 경과위원장을 거쳐 80년 8월 파격적으로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에 임명된다. 당시 나이 42세였다. 그는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5공 경제정책의 기조를 만들었다.

이른바 ‘김재익 신화’는 당시 남 부총리(현 산학협동재단 이사장)의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면 탄생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남 이사장과 김재익의 인연은 남 이사장이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이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 교수는 66년 같은 대학 이승윤(李承潤·전 재정경제부장관) 김병국(金炳國) 교수 등과 함께 ‘통화량 결정요인과 금융정책’이라는 논문을 발표해 주목을 받는다.

당시 한국은행 직원으로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던 김재익은 논문에 인용된 자료도 구하고 미 유학 경험담도 듣기 위해 남 교수를 수시로 찾아갔다. 두 사람은 68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초청교수와 대학원생으로 다시 만난다. 남 이사장의 회고.

“김재익은 문제의 핵심을 짚어내는 능력이 무척 뛰어난 인재였습니다. 미국에서도 김재익이 공직에 적합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경제부총리가 되고 나니 다시 그가 생각났습니다. 당시는 외자 도입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는데 한국 경제의 실상을 미국에 제대로 알리고 미국을 설득할 만한 적임자가 고시 출신 중에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정직인 비서실장으로 그를 불러들였고 나중에 경제기획국장을 시킨거지요.”

김재익과 함께 83년 버마(미얀마) 아웅산 폭발사건으로 아깝게 순직했지만 서석준(徐錫俊) 전 경제부총리도 남 이사장이 발탁한 대표적 경제관료 가운데 한명이다.

77년 11월 청와대 업무보고를 마친 남 부총리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과 잠시 한담을 나눈다.

“남 부총리, 고민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기획원 차관에 누구를 앉힐지 걱정입니다. 서석준 차관보가 적임자이기는 한데 나이가 이제 서른아홉입니다. 기획원 차관은 차관회의를 주재하는 중요한 자리인데 다른 부처 차관들이 반발하지나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차관보가 차관으로 바로 승진한 예도 없어 기획원 안에서도 반발이 있을 것 같습니다.”

“괜찮아. 처음엔 반발해도 며칠 지나면 아무 일 없는 것이 공무원들의 속성이야.”

이렇게 기획원 차관이 된 서석준은 대통령경제1수석비서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 상공부장관을 거쳐 83년 7월 최연소 경제부총리에 오른다.

남 이사장은 “내가 개인적으로 김재익과 서석준을 총애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 자리에 꼭 필요한 사람이어서 썼을 뿐”이라고 했지만 백낙일고(伯樂一顧·명마가 백낙을 만나 세상에 알려진다는 중국의 고사성어)의 백낙이 따로 없었다.

▼남덕우 前국무총리는 ▼

한국의 미시경제학과 화폐금융론 발전에 큰 족적을 남긴 경제학자이자 70년대 고도성장을 이끈 행정 관료다. 그에게는 ‘서강학파의 리더’ ‘고도성장의 조형사(造形師)’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녔다. 1969년 10월부터 78년 12월까지 재무부장관과 경제부총리를 내리 지냈고 80년대 이후에는 국무총리와 한국무역협회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가 중용한 인물들이 나중에 경제부총리와 주요 경제장관직에 줄줄이 올라 한국 경제관료 인맥의 ‘대부(代父)’로도 통한다.

천광암기자 ia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