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번째 은퇴… 황제는 어디로?
“아듀, 조던.”
프로농구 ‘영웅 시대’가 저문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40·워싱턴 위저즈). 20년 가까이 미국프로농구(NBA)를 호령해왔던 그가 17일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와의 원정경기를 끝으로 코트를 떠난다.
‘에어’라는 별명처럼 하늘을 나는 듯한 긴 체공시간, 곡예같은 슬램덩크, 현란한 드리블과 그의 트레이드마크처럼 되어버린 페이드 어웨이슛….
빡빡 민 머리와 밀집수비를 헤집을 때마다 길게 혀를 빼물던 모습을 이젠 더 이상 볼 수 없다.
63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난 조던은 84년 노스캐롤라이나대학 재학 중 NBA 전체 드래프트 3번으로 시카고 불스에 입단, 85년 신인왕을 차지하며 화려하게 프로무대에 데뷔했다.
그는 이후 팀을 6차례 우승(91,92,93,96,97,98)시켰고 이 때마다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MVP)를 거머쥐었다.
조던은 그동안 두 차례 농구를 떠났다. 93년 정신적 지주이던 아버지가 총에 맞아 사망했을 때가 처음. 그가 떠나자 소속팀 불스는 그의 등번호 23번을 영구결번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조던을 예우한 것.
은퇴 후 조던은 프로야구선수로 변신했다. 그러나 야구선수로서의 조던은 신통치 않았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산하 버밍햄 바론스에서 뛴 94년 기록이 타율 2할2리에 도루 30개 홈런3개, 연봉은 단 1만달러에 불과했다.
여기에 농구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데다 ‘조던 효과’를 노린 NBA의 집요한 설득이 더해지면서 조던은 95년 불스에 복귀했다.
NBA 복귀와 함께 그가 모델로 나선 맥도널드 등 관련회사 주식이 폭등했고 조던은 95년 한 해 동안에만 390만달러의 연봉에 광고료 등 4000만달러의 수입을 올려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을 제치고 운동선수 가운데 최고수입을 올렸다.
조던은 99년 1월 두 번째로 코트를 떠났다. “체력은 자신있지만 정신적으로 지쳤기 때문”이라는 이유. 코트에서뿐 아니라 코트 밖에서도 높은 점수를 받아온 그였지만 농구를 떠난 뒤에는 내기골프와 도박에 빠져지내는 등 심한 후유증을 앓았다.
그는 결국 2001년 9월 “농구를 너무나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조던은 올해 40세. 그는 워싱턴 위저즈 유니폼을 입고 마지막으로 팀을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일부 후배들은 ‘조던이 너무 나서는 바람에 후배들의 성장을 방해했다’며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다.
“농구하기에 적당한 나이가 아니다”라는 그의 말처럼 은퇴 이유는 체력의 한계. 그러나 ‘20세기 농구의 가장 위대한 걸작품’으로 불리는 그의 은퇴는 여전히 세계 농구팬들에게 아쉬움을 던져주고 있다.
조던은 은퇴한 후 친정팀인 시카고 불스 단장을 맡거나 워싱턴 위저즈의 구단주를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이원홍기자 bluesky@donga.com
마이클 조던의 NBA 기록구 분기 록최다시즌 득점왕10시즌최다 연속시즌 득점왕 타이7시즌(윌트 체임벌린과 동률)최다 연속 경기 두자릿수 득점842경기최다 시즌 야투 성공, 시도 1위10시즌전반 최다 자유투 성공20개(92년 12월30일 마이애미전)한 쿼터 최다 자유투 성공14개(89년 11월15일 유타 재즈전,
92년 12월30일 마이애미전)한 쿼터, 전반 최다 자유투 시도23개(92년 12월30일 마이애미전)챔피언결정전 평균 최다 득점41점(93년)플레이오프 평균 최다 득점33.4점플레이오프 한 경기 최다 득점63점(86년 5월20일 보스턴 셀틱스전)
● 명장면 베스트 10
시카고 불스 홈구장인 유나이티드센터 정문 앞에는 마이클 조던의 전신 동상이 서있다. 99년 1월 조던이 은퇴했을 때 세운 이 기념물에는 ‘이제껏 최고였으며 앞으로도 최고’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신이 인간의 모습을 빌려 태어났다’는 찬사를 들은 조던이 남긴 전무후무할 활약은 일일이 꼽을 수조차 없을 정도.USA투데이 NBA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듀프리가 꼽은 명장면 10선을 소개한다.
① 1998년 시카고-유타 챔피언결정 6차전
조던이 불스 유니폼을 입고 뛴 마지막 경기. 이날 45점을 터뜨린 조던은 경기 막판 유타 칼 말론의 공을 가로채 결승골까지 터뜨렸다.
② 1997년 시카고-유타 챔피언결정 5차전
경기 전날 조던은 상한 피자를 먹고 식중독에 걸렸다. 탈수 증세와 어지럼증에 시달려 제대로 서있기조차 힘들었지만 무려 44분이나 뛰었다. 38점에 결승 3점포도 조던의 몫. 당시 팀 동료 스카티 피펜은 “조던은 유니폼 입을 기운조차 없어 보였다. 그는 위대한 선수일 뿐 아니라 위대한 리더였다”고 극찬.
③ 1986년 시카고-보스턴 플레이오프 1회전 2차전
미래의 조던을 예고한 경기. 정규리그에서 발이 부러져 18경기 밖에 못 뛰었던 23세의 어린 조던은 집중 수비 속에서도 NBA 플레이오프 한 경기 최다득점인 63점을 퍼부었다.
④ 1995년 시카고-뉴욕 정규리그
18개월간 프로야구에서 ‘외도’했다가 복귀한 조던의 첫 뉴욕 원정경기. 등번호 23번 대신 45번을 달고나온 조던은 55점을 터뜨리며 건재를 과시.
⑤ 1992년 시카고-포틀랜드 챔피언결정 1차전
뉴욕과의 동부콘퍼런스 결승에서 7차전까지 가는 격전을 치르고 챔프전에 오른 조던은 고전하리라는 예상과 달리 전반에만 NBA 최다인 3점슛 6개를 집중시키며 팀 승리를 이끌었다.
⑥ 1991년 시카고-LA레이커스 챔피언결정 2차전
처음으로 진출한 챔프전에서 1차전을 패해 화가 난 조던은 포인트가드로 출전해 18개의 야투를 던져 15개를 적중시키고 어시스트도 13개나 올려 승리의 주역이 됐다. 조던이 처음 우승 반지를 낀 시즌.
⑦ 1998년 시카고-뉴욕 정규리그 최종전
두번째 은퇴를 앞둔 고별전. 84년 신었던 원조 에어조던 농구화를 신고나온 조던은 발에 꼭 끼어 불편한 가운데도 42점을 넣으며 팬들과 아쉬운 작별을 했다. 그동안 자신이 받은 사랑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옛 신발을 신었다는 게 조던의 말
⑧ 2003년 워싱턴-뉴저지 정규리그
동부 콘퍼런스 1위의 강호 뉴저지를 맞아 조던은 불혹을 넘긴 나이에도 43분을 소화해 내며 43점을 꽂았다. 40세를 넘긴 선수가 40점 이상을 기록한 것은 조던이 처음.
⑨ 1997년 시카고-마이애미 동부콘퍼런스 결승 4차전
팀의 3연승을 견인한 조던은 경기 전날 해뜰 때부터 해질 때 까지 골프를 쳤다. 그 영향이었던지 조던은 3쿼터까지 15개의 슈팅을 연달아 놓치며 22개의 야투 가운데 단 1개를 적중시켰다. 하지만 4쿼터에만 20점을 몰아넣는 저력을 보였다. 팀 동료 스티브 커는 “조던의 오만함과 자신감을 보여준 한판”이었다고 평가.
⑩ 1986년 시카고-유타 정규리그
조던에게 키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 경기. 1m98의 조던이 1m85인 유타 존 스탁턴의 수비를 앞에 두고 덩크를 터뜨리자 관중의 야유가 쏟아졌다. 이에 바로 다음 공격에서 2m16인 멜 머핀의 마크를 뚫고 다시 덩크를 꽂은 조던은 팬들을 향해 “이 정도면 됐느냐”고 소리를 쳤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
● 조던 있는 곳에 돈 있다
마이클 조던은 최고의 ‘흥행카드’였다.
시카고 불스 시절 610경기 연속 홈게임 매진 행진을 이끌었던 조던은 워싱턴 위저즈에서 뛴 2시즌 동안 홈게임에서 82차례나 매진사례를 올렸다. 승률 5할을 밑도는 위싱턴의 성적을 감안할 때 조던의 뜨거운 인기가 다시 한번 입증된 셈.
조던이 프런트에서 일하던 2000∼2001시즌 워싱턴은 관중동원 순위에서 홈게임 18위, 원정경기 22위에 머물렀으나 조던이 뛴 지난 시즌에는 홈과 원정경기에서 모두 2위로 껑충 뛰었다. 올 시즌에는 홈 2위에, 원정경기에서는 1위에 올라섰다. 조던의 위저즈는 3200만달러 이상의 입장권 판매 수입을 추가로 가져왔다는 분석.
하지만 조던이 전체 경제에 미친 효과는 전성기에 훨씬 못 미쳤다는 지적. 98년 포천지는 조던 효과에 대해 100억달러(약 12조원)로 추산했으나 워싱턴 시절에는 팀 성적이 나빴던 데다 나이 탓에 TV 중계료, NBA 상품 및 스폰서 업체 매출 등에서 미미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김종석기자 kjs012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