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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크엔드 포커스]'문명의 충돌' 핵심은 “性 개념의 충돌”

입력 | 2003-04-17 17:16:00

서구와 이슬람권의 ‘문명의 충돌’은 ‘성(性)에 관한 가치관의 충돌’이라는 분석이 제기됐다. 사진은 뉴욕 거리를 걷고 있는 미국 여성(왼쪽)과 지리공부를 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여고생.동아일보 자료사진


‘문명의 충돌’이 아닌 ‘성(性)의 충돌’이다.

이라크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고 있지만 아랍권과 미국을 대표로 한 서방 세계의 갈등은 지금부터인지도 모른다. ‘문명의 충돌’ 때문일 수 있다. 그런데 이면을 짚어보면 두 문화권에서 성 개념에 대한 인식이 충돌하고 있다는 분석이 제기됐다.

미국의 권위있는 국제문제 전문 격월간지인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최신호는 향후 두 문명의 융화에 가장 큰 걸림돌을 바로 여기서 찾았다. 세대가 지날수록 성 개념에 대한 두 문명의 인식 차이는 더욱 깊어지고 있다는 것.

새뮤얼 헌팅턴 하버드대 교수가 96년 발간한 저서 ‘문명의 충돌’은 이런 측면에서 “절반만 옳다”고 포린 폴리시는 지적했다.

냉전 종식 후 헌팅턴 교수가 양 문명의 ‘문화적’ 차이를 갈등의 요인으로 본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지만 그 대표적인 예를 정치적 가치(political value)의 차이에서 찾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는 것이다.

헌팅턴 교수는 저서에서 서구의 개인주의, 자유주의, 인권, 자유, 법률, 자유시장, 정교(政敎)분리 같은 개념들은 기본적으로 비서구권의 지배적인 개념과는 다르며 이 같은 서구가치를 보편적이라고 주장할수록 많은 이슬람국가(비서구권)에서 뿌리를 내리고 있는 원리주의와 같은 과격한 행동을 자극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포린 폴리시는 “비서구권에서도 정교 분리, 법률, 인권 등을 수호하는 ‘민주주의’를 선호하고 이를 받아들인 지 오래”라고 주장했다.

문제는 ‘데모스(demos)’가 아니라 ‘에로스(eros)’라는 것이다.

논문을 기고한 로널드 잉글하트(미시간대 정치학센터 국제가치조사 사회연구소 소장)와 피파 노리스(하버드대 케네디스쿨 강사)는 세계가치관조사 연구팀이 전 세계 70개국(서구 기독교 국가 22개국, 이슬람권 11개국 기타 37개국)을 상대로 95∼96년, 1999∼2001년 두 차례에 걸쳐 조사한 설문조사를 인용했다. 이 조사에 따르면 그 실천 여부를 떠나 민주주의의 보편적인 가치 및 체제에 대한 지지도는 아랍권에서 놀랄 만큼 높게 나왔다는 것.

일례로 이집트 모로코 터키 등 이슬람국가의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지지율은 미국(89%)보다 높게(92∼99%)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두 문명권의 차이는 ‘남녀 평등’ ‘동성애’ ‘이혼’ 등 성과 관련한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설문조사에서 성의 역할 및 평등에 관한 질문은 다음 4개였다.

①남자가 여성보다 더 훌륭한 정치 지도자의 자질을 갖췄다.

②대학교육은 남성에게 더 중요하다.

③여성은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만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④여성은 반드시 남성과의 안정된 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아야 한다.

이 질문들에 대해 서구권은 82%가 ‘부정적’이라고 답해 성평등 의식이 매우 강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 이슬람권은 55%만이 ‘부정적’이라고 답했다. 한편 서구에서 사회적 논쟁의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이혼, 낙태, 동성애에 대해서도 두 문명권의 태도가 엇갈렸다. 서구권 국가들에서 세 가지를 용납할 수 있다는 응답이 각각 60%, 48%, 53%였던 반면 이슬람권은 이보다 훨씬 낮은 35%, 25%, 12%의 응답률을 보여 대조를 이뤘다.

한편 두 설문조사 결과 서구 문명에서는 첫 번 째보다 두 번째 조사에서 남녀 불평등에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는 비율이 높아져 ‘남녀평등’ 의식이 높아진 반면 이슬람권에서는 두 번의 조사에서 큰 변화가 없었다. 시간이 갈수록 성에 대한 두 문명의 인식 차이가 벌어지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포린 폴리시▼

1970년 창간된 국제문제 전문 격월간지로 90여개국 1000만명의 독자들을 갖고 있으며 영어 외에 그리스, 아랍, 이탈리아, 스페인, 터키어 등으로도 출간된다. 치열한 경쟁을 거쳐 채택된 분석적이고 시사성 있는 글들로 명성을 얻어왔으며 전세계 학자 및 정재계 인사들이 기고를 희망하는 ‘지식 토론의 장’이기도 하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카네기 세계평화 기부 재단에서 발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