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서울 중랑구 신내동의 배밭 주말농장. 지난해 4월 주말농장 회원들이 먹골배 나무에 인공수분을 하고 있다. -동아일보 자료사진
서울 중랑구 신내동 배밭은 요즘 온통 뽀얀 배꽃(이화·梨花)의 물결이다. 멀리서 보면 설국(雪國)인 듯하고, 배나무 사이를 걷다보면 배꽃 터널 속에 들어온 듯하다.
이곳 배밭 일대가 가족나들이나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배꽃이 절정을 이루는 이번 주말에는 신내동 배밭 주말농장에서 꽃가루 묻혀주기 행사도 열린다.
신내동과 인근 묵동(墨洞) 일대는 먹골배로 유명한 곳. 먹골배는 수분과 당분이 많아 최상급 배로 알려져 있다. 먹골배는 이곳 먹골(묵동·묵은 먹을 뜻함)에서 생산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최근 택지 개발로 배밭이 줄어들었지만 지금도 20여만평에 3만8500여그루의 배나무가 자라고 있다.
먹골배의 유래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에서 처음 배나무를 키운 사람은 15세기 문신 왕방연(王邦衍).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 영월 땅으로 유배 갈 때 단종을 호송했던 인물이다. 단종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며 관직에서 물러난 왕방연은 이곳 봉화산 기슭에 은둔하면서 배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왕방연은 단종이 승하한 날이 되면 자신이 수확한 배를 바구니에 가득 담아놓고 영월을 향해 절을 올렸다고 한다. 그 배나무가 번식하면서 이 일대가 배밭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중랑구청 강민도(姜민道) 주임은 “먹골배엔 단종을 그리는 왕방연의 애틋한 마음과 눈물이 담겨있다”면서 “그래서인지 먹골배를 먹으면 혀끝에 오래도록 여운이 남고 씹을수록 단맛이 난다”고 자랑했다.
신내동엔 3곳의 배밭 주말농장이 있다. 그루당 8만원씩의 임대료를 내고 1년간 직접 나무를 가꾸고 배를 수확할 수도 있다.
현재 회원은 500여명. 회원 중에는 충남 조치원시, 충북 청주시 등에 사는 사람도 있다. 가지치기, 비료 주기, 농약 뿌리기 등 기술적인 일은 농장에서 해주고 회원은 꽃가루 묻혀주기, 열매 솎아주기, 봉지 씌우기, 수확 작업만 하면 된다.
20일엔 배꽃에 꽃가루를 묻혀주는 인공 수분(受粉) 행사가 열린다. 꽃가루를 옮겨 묻혀주는 벌과 나비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면서 사람이 수분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원이 아니어도 수분 행사엔 참가할 수 있다. 02-490-3365∼9.
배꽃의 낭만과 정취를 만끽하고 왕방연의 애틋한 흔적도 만날 수 있는 배밭 나들이. 왕방연의 시조를 한 수 읊어보면 더욱 멋진 추억이 될지 모른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단종) 여의옵고/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의 앉았도다/저 물도 내 안(마음)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울면서 밤길을 가는구나).’
이광표기자 kple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