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텔레비전 드라마 ‘야인시대’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좌우합작파인 여운형, 김규식 선생을 테러하고 김구 선생의 꾸지람을 들은 김두한이 일시 회의에 빠지자 유진산이 일갈한다. “그들은 회색분자들이다, 회색분자는 공산당보다 더 나쁘다.” 그 장면은 벌써 깨졌어야 할 광복 공간의 이분법적 구도가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현실을 새삼 일깨운다.
▼이분법 강요하는 ‘목청공화국’▼
“그동안 미군이 보여준 부적절한 행태에 대한 누적된 분노의 표출이 아니겠느냐. 그래도 과실치사한 미군을 살인 미군이라고 하고 미군의 존재 의의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을 온당하다고 하겠는가.” 이런 미지근한 시각이라면 회색분자이고 노골적인 친미나 반미주의자보다 더 나쁜가. “이라크 파병 반대운동에서 평화운동으로 승화된 시민운동의 고양된 모습을 본다. 그러나 냉엄한 현실을 직시하면 파병하는 정부의 고뇌도 이해가 된다.” 이런 양시론은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의 처신인가. “우리 교단의 권위주의 잔재, 성차별은 문제이나 교장선생님의 자살로까지 몰고 가는 황폐한 교육현장이 개탄스럽다”고 한다면 줏대 없는 양비론이라는 비난에 직면할 것인가. 국가적 의제에 대한 극렬한 이념대립 양상을 극복하고 양측의 접점을 찾아 이를 극대화하려는 노력이 회색분자, 기회주의자로 치부되는 척박한 현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하고 ‘토론공화국’은 ‘목청공화국’ 앞에 무력감만 느낀다.
민주국가에서 국가적 의제에 대해 국론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강조되는 일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군사정권 시절 한 줌밖에 되지 않는 반대세력을 향해 국론 분열을 획책한다고 눈을 부라리고, 반 줌도 안 되는 진보 진영에 국민을 이간질한다고 통박하던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국론 운운하면 주로 권력을 쥔 자들이 그들에 대한 저항을 차단하기 위한 무기로 사용해 온 개념으로 느껴지고, 국론 통일이란 명분으로 국민을 일사불란한 병영체제로 몰아가던 시기에 익숙했던 ‘강요된 국론’을 연상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강요된 국론에 길들여짐으로써 역설적으로 우리는 아직도 획일주의, 이분법적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합의된 국론’의 창출에 전혀 생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적 난제들이 중첩해 있는 오늘의 상황은 진정한 의미의 국론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과제 해결을 수임한 정부의 국론 통합 의지나 능력은 의문스럽다. 이라크 파병 문제만 해도 반전 여론으로 전 세계와 온 나라가 들끓고 있는데도 정부는 그 성향에 비추어 의아스러울 정도로 신속하게 파병을 결정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민사회, 국회의 반대 의견이 만만치 않은 가운데 국가인권위원회까지 공식적인 파병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아무리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더라도 사전에 시민사회 지도자, 의회 지도자의 의견을 구하고 인권위 같은 국가기관의 의사도 수렴한 다음 상당한 반대 의견이 있음에도 국익을 고려해 파병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면, 그것을 단순히 모양새만 갖춘 것이라 하겠는가. 국민 사이에서 거의 완벽할 정도로 합의가 되어 있는 검찰 개혁에 대해서는 평검사와 대화까지 하는 마당에 엄청난 이견이 있는 이라크 파병 문제에 대해서는 왜 의견 수렴 절차가 소략해야 했을까. 해봐야 결론이 안 날 일은 결단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무얼 토론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만 무성한 토론공화국에 그칠 것이다.
▼정부의 ‘갈등 통합능력’ 절실 ▼
정부의 통합능력은 법무부의 문민화라는 용어에서 가늠된다. 취지에는 동의하지만 어법은 당혹스럽다. 말꼬리를 잡아서가 아니라 이 말에서 그동안 정부가 보여준 이런저런 배제적 인식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국방부의 문민화라면 모를까 법무부의 문민화라니. 그러면 정부 부처 공무원이 모두 복귀하고 나면 청와대의 문민화가 이루어질 것인가. 아무리 새롭게 평가받고 싶어도 정부는 다름보다는 같음을, 가름보다는 모음을 강조해야 하고 차별화와 개별화는 그 다음이어야 한다. 갈등하는 민심 앞에서 정부야말로 회색분자가 되어 시(是)와 비(非)를 아울러야 한다.
박인제 객원논설위원·변호사 ijpark235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