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손’이 기획하고 이창동(李滄東) 문화관광부 장관이 전위에 나선 새 정부의 언론정책이 구체화하면서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고 있다. 언론이 정부를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부가 언론을 감시하고, 대통령이 언론의 비판을 박해라고 표현하는 상황, 친정부 언론이 비판 언론을 되레 공격하는 현실이 빚어지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와 국정홍보처는 ‘비판 언론 죽이기’가 목적인 ‘신 보도지침’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일선 부처는 “부처별 업무 현실을 감안하지 않은 막무가내식 정책”이라며 청와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아마추어리즘에 의한 설익은 정책이 현실과 충돌하거나 현실을 따라잡지 못하는 모순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외교·안보부처▼
청와대와 총리실 외교통상부 통일부 국방부 등 정치관련 부처들은 기존 기자실을 폐쇄하고 브리핑룸과 기사송고실을 만들어 개방한다는 국정홍보처의 기자실 개편안을 원칙적으로 따르겠다는 분위기다. 그러나 대부분의 부처들은 브리핑룸과 기사송고실을 어디에 만들 것인지조차 정하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다.
국정홍보처는 브리핑룸 및 기사송고실 공사만 서두를 경우 취재제한 수준이 강화되고 결국 국민의 알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대두될 것을 우려해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브리핑 기술을 교육하고 정보공개 관련 규정을 손질한 뒤 늦어도 올해 정기국회가 열리기 전 새로운 취재시스템을 본격 시행한다는 방침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새로운 취재시스템이 본격 시행되지 않고 있는 현재도 부실한 브리핑으로 인해 혼선이 빚어지거나 취재원 접근에 어려움을 겪는 등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다. 청와대의 경우 과거 정부 때는 하루에 두 번씩 비서실 방문 취재가 허용됐으나 현 정부 들어서는 기자들의 비서실 방문이 금지되면서 취재에 지장을 받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북한 핵문제를 풀기 위한 다자대화에 한국이 제외되더라도 다자대화를 빨리 시작해야 한다는 윤영관(尹永寬) 외교통상부 장관의 국회 발언의 배경을 취재하기 위해 15일 청와대 출입기자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와의 접촉을 수차례 시도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 관계자는 개인 휴대전화를 꺼놓은 상태였으며 관용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비서는 기자의 취재요청에 대해 “지금은 퇴근한 상태여서 연락하기가 어렵다”며 “내일 아침에 질문지를 작성해 제출해 주면 답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공기업 인선을 총괄하고 있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대부분 회의 중인 상태여서 전화 취재마저도 ‘하늘의 별따기’다. 기자와 어렵사리 전화통화가 이뤄져도 그는 “길게 말할 시간이 없다”거나 “다음에 전화하라”면서 일방적으로 끊어 제대로 취재가 안 되는 실정이다. 그는 통화 도중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면서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기도 했다.
조영동(趙永東) 국정홍보처장은 8일 노무현(盧武鉉) 대통령 주재로 열린 국무회의 내용을 브리핑하면서 달러(불)와 그루(본)를 혼동해 국무위원의 발언내용을 잘못 전달했다. 정세현(丁世鉉) 통일부 장관이 “임진강 하류의 수해를 막기 위해선 북한에 1억본의 나무를 줘야 한다”고 보고했으나 조 처장은 ‘1억불’이라고 브리핑했다. 기자들이 이상하게 여겨 재확인을 요구해 바로잡혔지만 조 처장의 브리핑대로 보도했다면 오보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부처▼
경제부처가 몰려 있는 경기 과천시의 취재환경은 종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거의 없다. 이는 경제관료들이 상대적으로 합리적인 데다 언론, 그중에서도 메이저신문과의 갈등이 업무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
이 때문에 현 정부 핵심인사들이 밀어붙이고 있어 따라가는 모양새는 취하고 있지만 이른바 ‘새 언론정책’의 효과에 대해 내심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다. 하지만 공무원 조직의 속성상 ‘언론의 잘못된 보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라’는 지침이 내려온 이후 재정경제부의 경우 해명자료가 적어도 하루에 두 세건씩 나오고 있다. 이 가운데 틀린 사실을 적시(摘示)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달리 해석할 수 있는 해설성 기사마저 오보로 취급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또 정보통신부 등 다른 경제부처도 매일 오전 우호, 비판 등 기사분류법에 따라 기사를 분류해 보고하고 있으며 비판기사에 대한 해명자료가 전에 비해 훨씬 많이 나오고 있다.
한 경제부처의 공보관실 직원은 “악의적인 보도, 단순 실수 등을 가를 수 있는 마땅한 기준이 없어 동아 조선 중앙일보 등 비판적인 기사를 많이 쓰는 신문의 기사는 일단 ‘악의’로 분류해 올리는 경향도 있다”고 털어놓았다. 경제관료들은 또 해당 부처에 부정적 기사가 나오면 ‘실체적 진실’에 관계없이 청와대 등 외부의 요구 때문에 강경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사무실 방문금지와 관련해 재경부의 한 간부는 “기자들과 토론하면서 시중의 민심이 어떤지 또는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파악해 경제관료들도 얻는 게 많았다”며 “기자 방문을 완전 금지하면 정책담당자들도 갑갑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과천청사는 또 새 건물을 지은 중앙청사와 달리 공간이 전혀 없어 마땅한 통합브리핑룸을 마련하지 못해 각 부처가 고심하고 있다. 독립청사를 사용하는 기획예산처나 해양수산부는 다른 측면에서 고민이 적지 않다. 장관이 나서 정례적으로 브리핑하라는 게 홍보처 방침이나 그 정도 함량의 발표자료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장관의 기자회견장에 기자가 거의 없으면 창피한 일인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난감해하고 있다.
▼사회부처▼
청와대와 문화관광부 주도로 진행되고 있는 취재 시스템 변경에 대해 가장 ‘소극적 수동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상주 기자만 60명이 넘는 검찰의 경우 대검 중수부나 공안부, 범죄 정보 기획관실 등 주요 수사 부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브리핑 제도가 일반화돼 ‘위로부터의’ 취재 시스템 변화 요구가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검찰이 일반 행정부처와 같이 기자실 운영을 바꾸기보다는 수동적으로 관망하다가 복안을 마련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태도는 경찰도 다를 게 없다. 섣불리 기자실을 브리핑룸으로 바꾸고 등록제 등으로 전환했을 경우 70여개의 ‘경찰 관련’ 군소 언론사들에까지 ‘출입증’을 발급해야 하고 중요한 사건의 보도자제 요청(엠바고)도 지켜질 수 없다는 불안감 때문이다.
국정홍보처의 지시로 가판 구독을 중단한 것이 그나마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나마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경찰과 검찰은 인터넷을 통해 가판 신문을 미리 보고 문제가 될만한 기사의 경우 ‘조치’를 취한다. 한편 보건복지 노동 환경 여성부 등의 취재 시스템도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정부과천청사에 있는 정부 기관들은 안내동 등에 대형 브리핑룸을 신설한다는 데 합의했지만 현재 기자실은 규모를 줄여 취재지원실로 개편해 송고 등 취재 편의를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환경부는 “업무 특성상 개발 부처와 마찰을 빚거나 국민의 이해를 구해야 할 사항이 많기 때문에 현안에 대한 각종 자료를 제공하며 언론을 적극적으로 설득해야 한다”며 “기자들을 밖으로 내몰면 공무원들이 오히려 불편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명숙(韓明淑) 환경부 장관은 얼마 전 기자실을 방문해 “적어도 환경부는 언론과 대립할 필요가 없다”며 “정부 차원에서 취재 시스템을 제한하더라도 환경부는 기자들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말했다.
노동부는 2일부터 매주 수요일 오전 기자실에서 ‘티타임’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권기홍(權奇洪) 장관, 박길상(朴吉祥) 차관, 정병석(鄭秉錫) 기획관리실장이 각각 한 차례씩 기자실을 찾았다. 노동부는 특별히 기사화할 만한 사안이 없더라도 외국인 근로자 고용허가제, 주5일 근무제, 비정규직 근로자 문제 등 산적한 현안에 대해 언론의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담회를 정례화하기로 했다.
서울 세종로 정부중앙청사에 위치한 교육부와 행정자치부 등의 경우 공무원들이 오히려 통합 브리핑룸 설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의 한 공무원은 “교육정책에 대한 홍보 성격의 자료가 많은데 통합 브리핑룸이 설치되면 일하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며 “우리가 총리실보다 기사량에서 뒤지지 않는데 부총리 부처를 우습게 아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화부·전문가그룹▼
문화관광부는 3월15일 정부 부처로는 처음으로 ‘홍보업무 운영 방안’으로 취재시스템의 변화를 주도했으나 한달여가 지난 현재 내부에서는 방안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시하는 분위기다.
오지철 문화부 차관은 “사전 연락없이 사무실 출입을 자제해달라는 것 외에 바뀐 점이 없다”며 “기자와 공무원간의 저녁이나 점심식사도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문화부의 직원들도 취재 자유의 제한 논란을 불러온 취재원 실명제나 취재 응대 후 통보가 무리수라는 점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문화부는 인터넷 홈페이지에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개하고 있으나 실적 위주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 문화부는 3월25일∼4월15일 167건의 정보를 공개했다고 밝혔으나 등록 기자들은 “기사화할 가치가 거의 없는 것이 많다”고 지적하고 있다. ‘홍보업무 운영 방안’에 대해서도 문화부 내부의 이해가 엇갈려 기자의 자료 요청에 실무진이 공보관을 통하라고 주문했으나 공보관은 “그럴 필요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문가그룹 중에서는 언론정책과 관련한 언론학자들의 칼럼 기고나 코멘트 기피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평소 언론 문제에 대해 특정한 주장을 해온 학자들도 코멘트나 칼럼 청탁에 “입장을 드러내기 곤란하다”며 고사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 같은 현상은 정부의 언론정책이 강경해질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언론학자는 “정부도 막강하고 언론도 막강한데 굳이 나서서 어느 한쪽에 찍힐 필요가 있겠느냐”고 말했다.
또 현 정부의 언론정책을 비판하는 칼럼을 써온 언론학자들도 몸을 사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에 따라 사회학자나 정치학자 헌법학자들이 현 정부의 언론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표명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허엽기자 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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